1989년 ‘단독 방북사건’으로 구속됐던 문익환 목사가 풀려난 직후인 93년 4월16일 흥사단 강당에서 사월혁명상 수상자들에게 축하말을 하고 있다. 문 목사는 필자와 전교조 쪽에 ‘통일맞이’ 사무실을 인수해 통일운동을 해줄 것을 제안했으나 끝내 성사되지 못한 채 이듬해 숨을 거뒀다.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85
우리 시대 민주화운동가이며 통일운동가, 그리고 시인이셨던 늦봄 문익환 목사님을 생각하면 늘 죄송하고 마음이 무겁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상임고문이었던 문 목사님은 1989년 3월25일,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초청을 받아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회담한 뒤 4월3일 귀국했다. 귀환 즉시 문 목사님은 정부와 사전협의 없이 독자적으로 방북해 활동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 잠입죄’로 구속되었다.
89년은 통일 논의를 대중적으로 확산하기 위한 움직임이 어느 때보다 활발했고, 여러 인사들이 방북했던 해였다. 소설가 황석영씨가 늦봄보다 하루 앞서 3월24일 방북했고, 6월30일에는 임수경 학생이 전대협 대표로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평양축전) 참석을 위해 방북했다. 문규현 신부는 6월과 7월 두 차례 방북해 임수경 학생과 함께 판문점으로 귀환했다.
93년 3월6일 사면으로 풀려난 문 목사님은 전민련 상임고문과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 제4차 범민족대회 대회장 등을 맡아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매진했다. 여러 사회단체의 초청강연 때마다 문 목사님은 89년 방북 때의 시대상황과 함께 전교조를 언급했다. “89년의 가장 큰 사건은 전교조 결성입니다. 선생님들이 노동자의 깃발을 올린 것은 우리 사회의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전교조 위원장으로서 나는 강연에 참석할 때마다 그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전교조 창립과 전교조 교사들의 역할을 매우 높이 평가했고, 전교조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93년 문 목사님은 ‘통일맞이 7천만 겨레모임 운동’을 제창하고 하반기부터 내게도 자주 연락을 했다. 때로는 임수경 학생을 통해 연락을 하기도 했다. ‘전교조가 중심이 돼 전대협 동지들과 함께 통일 문제를 이끌어 나가주면 틀림없이 통일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니 전교조가 아예 ‘통일맞이’ 사무실을 인수해 달라’는 말씀이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간곡한 제안에 나는 전교조 동지들과 이 문제를 논의했다. 정부와 한창 복직 협상을 진행하며, 전국 지부에 상근자를 100여명 남기기로 방향이 잡혀가던 중이었다. 간부들은 “100여명의 상근인력으로 전교조 본부와 15개 지부까지 운영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통일맞이’ 사무실까지 인수할 수 있겠느냐”며 부정적이었다. 문 목사님은 “전교조는 하려면 할 수 있는 조직 아니냐”며 안타까워했다. 답답한 마음에 나는 다시 한번 논의를 시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사실 당시 진보운동 진영에서는 문 목사님의 방북과 석방 이후 통일운동을 두고 의견이 갈려 있었다. 일부에서 통일 문제를 혼자서 좌지우지한다며 비판할 때는 문 목사님의 순수한 열정이 훼손당하는 듯해 안타까움이 앞섰다. 그러한 분위기를 느끼고 있던 터라 문 목사님이 ‘통일맞이’에 대한 제안을 했을 때 ‘놔버리고 싶으신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우리의 역량이 그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답을 드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가 바뀐 94년 1월3일, 전국연합 시무식에서 만났을 때 문 목사님이 남아서 얘기를 좀 하자고 붙잡았다. 하지만 그때도 “나중에 조금 여유를 갖고 생각해 봐야지, 지금은 도저히 어렵습니다” 하고 답했다. 전화를 해도, 만나서 얘기를 해도 같은 답이 반복되자 문 목사님은 난망한 표정으로 돌아 나섰다. 그 뒤를 따라 나가면서도 몹시 미안하고 불편한 마음이었다. 그로부터 보름쯤 뒤인 1월18일, 문 목사님은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충격이었다. 당신의 뜻을 오해하고 뜻밖에 한쪽에 몰린 상태에서 심장마비가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문 목사님께 항상 빚진 마음 때문에 어디서 사진만 봐도 저절로 ‘죄송합니다’ 하는 말이 나오곤 했다.
묘소를 찾을 때마다 문 목사님은 여전히 음지쪽에 있는 듯해 죄송스런 마음으로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를 읊곤 한다.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누가 시인이 아니랄까봐서/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 거야/ 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 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 거라고…(중략)…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 넋만은 살아 자유의 깃발로 드높이/ 나부끼는 일이라고…(중략)…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후략)’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누가 시인이 아니랄까봐서/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 거야/ 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 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 거라고…(중략)…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 넋만은 살아 자유의 깃발로 드높이/ 나부끼는 일이라고…(중략)…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후략)’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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