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조 해직교사 1호이자 최고령이었던 이규삼 선생이 복직 4년 만에 정년퇴임을 맞아 1997년 12월 서울 동원초등학교에서 마지막 수업을 하고 있다. 87년 전국초등교사협의회 창립 회장, 89년 전교조건설추진위원장을 맡아 해직됐던 그는 정년 뒤에도 한국퇴직교원협의회를 조직해 교육운동에 헌신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86
문민정부 출범으로 교육개혁에 대한 학부모와 교원단체의 열망은 그 어느때보다 높았지만 김영삼 정부 첫해의 교육개혁 추진은 ‘매우 미흡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93년 11월 당시 공보처가 실시한 국민여론조사에서 ‘개혁이 가장 필요한 분야’ 1위로 교육 분야가 꼽혔다. 같은 시기 교육개혁위원회의 사무국이 94년 2월 공식출범에 대비해 벌인 국민의식조사에서도 교육 현실에 대한 불만족이 63.0%로 나타났다. 교육정책 잘못과 열악한 교육환경이 주요인으로 지적됐다. 교육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로는 학벌 위주와 빈약한 교육재정을 꼽았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의 핵심 공약이었던 교육재정 확보는 물거품이 되었고, 교육개혁의 최대 현안이었던 전교조 합법화는 미해결 과제로 남겨졌다. 해직교사 복직문제 또한 전교조 관련 해직으로 제한되었을 뿐 아니라 그마저도 상당수가 제외된 미완의 복직이었다. 터져 나오는 교육 비리와 문제 사학에 대한 해결책도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93년 7월 한미투자환경개선위원회(PEI) 결정에 따라 95년부터 교육시장 개방 일정이 확정됐다.
세계 각국은 교육을 국가 경쟁력 강화에 필요한 인력 확보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보고 교육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전교조는 교육개혁을 향한 세계적 추세와 김영삼 정부의 정책을 분석·평가하면서 교육개혁의 성공적 추진을 위해 내키지 않는 조건부 복직이지만 받아들였다. 새로운 전교조상을 세우고 ‘능력있는 교사, 실천하는 교사, 앞서가는 교사’가 되고자 노력하며 전교조 합법화와 올바른 교육개혁을 위해 적극 실천하기로 결의했다.
복직을 앞두고 전국의 초·중·고 교장 선생님들 앞으로 전교조 위원장 이름으로 서신을 띄웠다. “해직교사를 맞는 교장 선생님들의 심경을 헤아려 봅니다. 실정법이라는 현실의 장벽 때문에 선생님들과 겪었던 불가피한 갈등과 아픔도 더듬어 보게 됩니다. 교육당국은 교장 선생님들의 반대로 선별복직이 어쩔 수 없다며 몇차례의 여과장치를 만들어 해직교사들은 또 한번 상처를 입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울타리에서 2세 교육을 걸머진 공동운명체가 되었습니다. 교육계 선배이신 교장 선생님들께서도 이제 포용력과 변화에 대한 열린 가슴으로 해직교사들을 맞아 교육 발전을 위한 동반자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마침내 94년 3월1일 1294명이 특별채용 형식으로 교단에 다시 섰다. 정부 방침에 따라 채용신청을 한 해직교사 1421명 중 91%에 지나지 않았다. 복직교사 가운데에는 조합원 중 연세가 가장 많았던 이규삼 선생님도 포함되었다. 선생님은 초등교사로 전교협 전국 부회장, 전교조 창립 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교육계 선배였다. 중등보다 수직적인 관계가 강한 초등학교의 원로 교사로서 교육운동을 한다는 것, 더구나 간부를 맡아 활동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교육이 바로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전교조 건설에 나섰고 파면을 당하는 어려움을 감내했다.
이 선생님은 전교조 운영을 위해 일부가 남아야 한다는 것과 또 일부 선생님들이 복직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에 마음 아파했다. 어느날 선생님과 단둘이 찻집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생님은 지도부와 함께 남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워원장으로서 단호하게 말씀드렸다. “지도부를 대신해서 선생님께서 복직해 주십시오. 선생님께서 앞장서서 후배들을 이끌고 교단에 돌아가셔야 우리 복직의 의미가 더욱 살아날 것입니다. 선생님 학교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아,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해야지요.”
이 선생님은 98년 퇴직 뒤에는 퇴직교사 조직운동을 하다 2004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치료를 위해 딸이 살던 캐나다에 머무르다 2010년 1월 운명했다. 끝내 원상회복이 되지 않은 상태로 세상을 떠난 선생님을 한국으로 모셔와 전교조장으로 보내면서 마음이 아팠다. 그나마 위안을 삼은 건 퇴직을 1년 앞둔 그때 복직을 강권한 일이었다. 합법화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때 복직하지 않았더라면 교단에 영영 돌아가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93년 말 주요 일간지에서 ‘올해의 10대 뉴스 인물’에 유일한 여성으로 포함됐다. “정해숙 위원장은 ‘정부와 재야 간에 타협은 없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리며 해직교사의 전교조 탈퇴조건을 수락하도록 결단을 내려 4년에 걸친 전교조 문제 해결의 기틀을 마련했다. … ‘참교육을 위한 현장에서의 새 출발’을 소신있게 설득, 문민시대의 재야상을 신선하게 탈바꿈시켰다”는 것이 선정 이유였다.
94년 5월13일에는 불교인권위원회(공동대표 월주 스님·한상범)로부터 불교인권상을 받았다. 서준식씨도 함께 수상했다. 불교계에서는 군부독재 시절부터 지선 스님, 진관 스님, 학담(전 법성) 스님 등이 전교조 운동에 큰 힘을 보태주었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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