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2월4일 서울 삼청동 삼일빌딩에서 당시 이회창 국무총리, 김숙희 교육부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교육개혁위원회 현판식을 하고 있다. 문민정부의 교육개혁을 주도하고자 설치된 대통령 자문기구로, 전교조에서 요구해온 복수 교원단체 결성 허용 방안을 처음 논의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88
1994년 상반기 2월 발족한 교육개혁위원회에서 한국교총 이외의 교원단체 결성 허용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노조를 제외한 특수법인 형태의 복수단체안과 노조를 포함한 복수단체안 두 방향으로 검토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교육법은 ‘오로지 하나의 교원단체’만을 허용하고 있었다. 국제적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한국만의 상황으로 한국교총이 40년 이상 유일 교원단체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따라서 국제노동기구(ILO)는 기본조약조차 비준하지 않고 있는 한국 정부에 교사와 공무원의 노동기본권 인정을 여러 차례 권고했다. 국제교원단체총연맹(EI)은 93년 전교조 가입 결정에 이어 94년 조사 활동을 위한 대표단을 파견하는 등 전교조를 인정하고 있었다. 정부는 교총만을 유일단체로 인정하는 한 국제적 압력을 피해갈 수 없었기에 복수단체 허용을 검토하고 있었다. 전교조는 당연히 노조를 포함한 복수단체 허용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전교조 결성 5돌 기념 전국교사대회가 5월29일 동국대에서 열렸다. 해직교사 복직 이후 처음 열린 교사대회에는 1만5000여명의 교사·예비교사·학부모가 모여 ‘희망 넘치는 교육을 위해 학교개혁을 이뤄내자’는 결의를 다졌다. 그런데 그해 역시 대회장 주변에는 많은 교육관료들이 배치돼 있었다. 특히 서울교육청은 사전에 교감단회의를 열어 교사들의 대회 참여를 적극 저지할 것을 시달하고, 600여명의 관료(교감 등)를 배치했다고 한다.
그즈음 나는 한국과 타이를 오갔다. 방콕에서는 국제총연맹 아시아태평양지역 여성 세미나와 ‘발전을 위한 교육’ 주제의 총회가 교사대회 앞뒤에 열릴 예정이었다. 방콕의 여성세미나에 참석했다가 서울로 돌아와 교사대회에 참석한 뒤 바로 다음날 또 방콕으로 향하는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외국 대표들의 전교조에 대한 관심은 매우 컸다. 나는 한국의 교육상황과 해직교사 복직, 전교조 합법화 투쟁에 대해 설명을 했다. 내 보고가 길어지자 누군가가 제지를 했지만 여러 대표들이 반발해 의장의 직권으로 끝까지 발표를 했을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함께 참여한 이수호 부위원장, 이동진 국제국장과 식당에 갔다가 우연히 만난 현지 주재원은 “수고들 하신다”며 식사 대접을 해주었다. 한 동포 집에 초청받았는데 그때 이미 김치가 외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도 했다. 타이 사람들도 월급을 더 주면서까지 김치 담글 줄 아는 파출부를 고용하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94년 민주노조운동은 기업별 노조의 산별노조 전환과 민주노총 건설을 위한 행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임금인상이나 회사 내 근로조건 개선에 초점을 둔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뛰어넘어 노동시간 단축, 고용문제, 사회보장 정책 등 산업 전체의 문제와 사회문제에 제대로 대응하기 위한 필요가 제기되었던 것이다.
민주노총 건설을 준비해 가던 늦은 가을, 어느 자리에서인가 청년 노동자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 청년은 고향이 광주로, 중학교 1학년 때 80년 5월 광주의 비극을 겪었다고 했다. 어린 눈으로 도청 앞과 금남로 거리 등 광주시내 곳곳에서 군인들의 군홧발과 총칼에 의해 수많은 시민들이 비참하게 쓰러져가는 참담한 광경을 목격했던 것이다. 하지만 형편이 좋지 않아 고교 졸업 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공장에 취직한 그는 산업 역군으로 보람을 느끼며 열심히 일했다고 했다. 그러다 자본가로부터 탄압을 받아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사회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광주가 고향이라 하기에 얼마 전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들려줬다. 전국적으로 외제 담배가 많이 팔리고 있는데, 특히 광주에서 가장 많이 팔린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보도 내용이 정확한지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참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이 무거운 음성으로 “선생님” 부르더니 “우리에게도 조국이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순간 나는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한동안 말없이 있다가 교사의 한 사람으로서 그냥 넘길 수가 없어 겨우 한마디 했다.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돼요. 올바른 역사는 민중의 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지요.” 더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어린 나이에 잔인한 국가폭력과 자본의 탄압을 겪은 그 청년의 절망 어린 한마디는 지금도 몸이 오싹해질 정도로 내겐 충격이었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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