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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길을찾아서] 좌우 이념갈등 속 존경했던 여운형 암살에 충격

등록 2011-12-07 19:57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 중·고교 통합 부산공립원예중학교를 다닌 박정기는 좌우 갈등으로 동창생과 교사들이 사라지는 현실을 목격한다. 사진은 원예중에서도 활동했던 우익 서북청년단원들의 관제 시위 장면.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 중·고교 통합 부산공립원예중학교를 다닌 박정기는 좌우 갈등으로 동창생과 교사들이 사라지는 현실을 목격한다. 사진은 원예중에서도 활동했던 우익 서북청년단원들의 관제 시위 장면.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박정기가 다니던 부산공립원예중학교(지금의 부산전자공고)에 어느날 한 무리의 낯선 학생들이 전학왔다. 북한에서 내려온 이들은 ‘서북청년단’으로 불렸다. 서북청년단은 미군정하에서 결성된 우익 반공단체로 제주4·3사건 때 악명을 떨쳤다. 서북청년단 학생들은 원예중 학도호국단에서 활동하며 좌익 학생들과 대립했다. 그들이 온 뒤 좌우 갈등으로 학교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스무명 남짓한 서북청년단의 실질적인 대장은 영어를 가르치는 박동계였다. 그는 육군 대위 출신이었는데, 들리는 소문으로는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이라는 말도 있었다. 우익 학생들은 박동계를 중심으로 조직화되어 있었다.

박정기 주변엔 좌익 친구도 우익 친구도 있었다. 마르크스, 레닌의 이름이 새겨진 책들이 중학생들 사이에서도 떠돌던 시절이었다.

좌익 활동을 하는 한 급우의 영향으로 박정기는 몽양 여운형을 알게 되었다. 몽양은 해방 정국에서 인기 많은 정치인이었다. 그 역시 몽양을 존경했다.

1947년 7월19일 여운형이 총탄에 사라졌다. 백의사 소속의 한지근 등이 서울 혜화동 로터리 근처에서 그를 암살했다. 박정기는 몽양 암살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학창시절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마저 떠난 것이다. 이별수 많은 시절이었다.

박정기는 한때 좌익 학생들 사이의 연락책을 맡았다. 하지만 그리 오래 하진 않았다. 마음 한편은 좌로 기울었지만, 그의 행동은 좌와 우 어느 편도 아니었다. 학교에서 그는 과묵한 학생이었고 외톨이였다. 어머니와 갓난 여동생 정옥을 잃은 슬픔이 사회에 대한 관심을 눌렀다.

그는 대신 달리기에 매달렸다. 흠뻑 땀을 흘리고 나면 정신이 들었다. 광복 이후 운동대회가 자주 열렸는데, 그는 대회 때마다 학교 대표로 마라톤에 출전했다. 나중에 마라톤이 힘들어 중거리로 종목을 바꿨다. 그는 배구팀에서도 학교 대표로 뛰었다. 배구가 유행하던 때였다.

원예중학교 5학년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전쟁과 함께 선생님과 친구들이 한 명씩 사라졌다. 영어를 가르쳤던 아버지의 친구 김일한도 갑자기 실종됐다. 어딘가로 끌려가서 죽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박정기는 좌익 성향의 김일한을 존경했다.


그가 가장 존경한 선생님은 국어를 가르치는 김갑수였다. 김갑수는 학생들에게 관심이 많고 다정해 학교에서 제일 인기있는 교사였다. 그는 자신이 쓴 시를 수업시간에 읽어주곤 했다. 언젠가 국어시간에 그가 읽어준 시를 박정기는 지금까지 외우고 있다. ‘산도 푸르다/ 물도 푸르다/ 흘러가는 가라나래/ 너도 푸르다’

그러나 ‘푸르름’의 꿈은 좌절되었다. 김갑수도 전쟁이 나자마자 행방불명되었다. 아침 조회시간에 한 말이 빌미가 되었다.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고 있을 때였는데, 그가 한 말은 단지 인민군의 포성소리가 포항에서도 들리더라는 소식을 전한 것뿐이었다. 아침에 들은 뉴스를 학생들에게 전해준 뒤 그는 바로 학교에서 사라졌다. 사람들은 보도연맹 사건에 희생된 것으로 추측했다. 그날 이후 학교에서 누구도 김갑수의 이름을 감히 입에 올릴 수 없었다.

사라진 건 교사들만이 아니었다. 학생들도 어딘가로 사라졌다. 훈육계 교사 이종윤은 박정기의 친척이어서 그의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학교에서 경찰서 출입을 맡고 있던 이종윤이 어느날 말했다. “우리 고향 학생 몇명을 내가 부탁해서 빼달라고 했다. 다른 학생들은 끌려가서 다 죽었다.”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그때 사라진 학생과 교사들을 그는 다시 만날 수 없었다. 학교는 전쟁통에 결국 문을 닫았다. 1년을 더 다녀야 했지만 전쟁이 끝난 뒤 그냥 졸업 학력을 인정해줬다. 박정기는 고향으로 돌아와 집을 지켰다.

원예중에서 알던 서북청년단 학생들은 휴전 이후 오랫동안 부산지역 보수단체에서 중심적으로 활동했다. 훗날 박정기가 시청에서 근무할 때 서북청년단원이었던 친구 한 명이 찾아온 적이 있다. 추레한 행색의 그 친구는 어려운 처지를 하소연했다. 박정기는 여유있는 형편이 아니었지만 막상 그를 보내려니 안쓰러워 한달치 월급을 빌려주었다. 그 후로도 그는 한차례 더 찾아왔다. 다른 친구들에게 얘기를 들어보니 여러 사람에게 손을 벌린 모양이었다. 돈을 빌리고 갚지 않은 일이 허다했다. 그 뒤 그와는 연락이 끊겼다.

서북청년단 출신 중에 곤궁한 모습을 보인 사람은 사실 그가 유일했다. 서북청년단 출신들은 대부분 관공서며 지역 보수단체의 요직을 차지했다. 구술작가/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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