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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경찰의 사망경위 설명 “‘탁’ 치니 ‘억’ 하고…” / 박정기

등록 2011-12-19 19:57

1987년 1월15일 박정기는 서울 용산 경찰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맏아들 박종부(왼쪽)와 만난 순간 ‘종철이가 죽었다’며 처음 오열을 터뜨렸다. 사진은 2010년 1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박종철기념사업회의 23주기 추모행사 때 함께한 박종부씨.
1987년 1월15일 박정기는 서울 용산 경찰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맏아들 박종부(왼쪽)와 만난 순간 ‘종철이가 죽었다’며 처음 오열을 터뜨렸다. 사진은 2010년 1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박종철기념사업회의 23주기 추모행사 때 함께한 박종부씨.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11
1987년 1월15일 새벽 6시가 넘어선 시각. 박종철의 형 박종부는 잠에서 깨어 출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오디오 개발회사인 인켈 해외영업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자취집의 현관문을 열자 낯선 남자 3명이 서 있었다.

“우린 형사입니다. 함께 갈 곳이 있습니다.”

그는 동생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가족들도 모르는 자취방을 형사들이 찾아낸 걸 보면 큰 사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들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온 줄 몰랐다.

“무슨 일입니까?”

“동생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상대로였다. 준비를 마치고 현관을 나서자 까만색 승용차 문이 열렸다. 차는 마포경찰서 앞을 지나 도로를 내달렸다. 앞유리 너머로 동이 트고 있었다.

어느덧 차가 목적지 가까이에 이르렀다. 대공분실 건물을 보는 순간 머리칼이 쭈뼛해졌다. 익히 알고 있는 건물이었다. 대공분실은 고문으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동생이 고문을 당했다는 생각에 분노가 일었다. 자신이 상상한 것보다 더 큰 일이었다. 그는 이때까지만 해도 동생이 경찰서에 연행되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박종부는 아버지 박정기가 먼저 와 있던 방으로 안내되었다. 열명 남짓한 경찰 간부들이 그를 일시에 바라보았다. 방 한가운데 넓은 회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몇은 앉고 몇은 서 있었다. 앉아 있는 이들 사이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박정기가 의자에서 일어서며 오열했다.


“종부야, 막내가 죽었데이.”

박정기는 큰아들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버지의 어깨가 흔들렸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지 말아야 할 것이….

경찰 간부들이 사고 경위를 설명했다. 심장마비라고 했다. 고문에 관한 얘기는 없었다.

그가 도착하기 전, 박정기는 경찰 간부 박원택으로부터 한 차례 상황 설명을 들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뒤 박정기는 아들을 죽인 자들을 불러달라고 요구했다. 잠시 후 조한경과 강진규가 도착했다. 그들은 박정기의 눈을 피했다. 경찰 책임자가 두 사람을 소개했다.

“대공분실 수사관들입니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성심이 지극하고, 그동안 대한민국 수사기관에서 근무하면서 많은 공로를 쌓았습니다.”

조한경은 자신을 ‘기독교 신자’라고 소개했다. 박정기가 두 사람에게 따져물었다.

“대관절 어뜨케 하니 사람이 죽드나?”

그들이 책상과 의자를 옮기며 취조실 상황을 재연했다. 박정기는 그들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기억하기 위해 애썼다. 재연을 요구한 것은 의도가 있었다. 나중에 다른 변명이 나왔을 때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박종부가 도착하자 박정기는 다시 재연을 요구했다.

“아까 한 것처럼 똑같이 설명해 주이소.”

박원택이 말했다.

“자세한 상황은 현장에서 설명하겠습니다.”

박정기·박종부 부자는 그들을 따라 5층 조사실로 이동했다. 조사실에서 고문 경관 조한경·강진규가 지켜보는 가운데 박원택이 상황을 재연했다. 그는 조사 과정에서 박종철이 답변을 거부했다고 설명했다. 잠시 후 그가 갑자기 주먹을 쥐고 과장된 몸짓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지켜보던 아들과 아버지가 깜짝 놀랐다. 박원택이 두 사람을 빤히 응시했다.

“보세요! 놀라셨죠? 이렇게 책상을 탁, 하고 치니까 억, 하고 쓰러졌어요. 심장마비로 쓰러진 겁니다.”

그것이 그들의 결론이었다. 박종부는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주변엔 경찰들 외에 어느 누구도 없었다. 이후 종철의 주검을 따라 벽제 화장장에 갈 때까지 가족들은 철저하게 고립되었다.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10분가량의 상황 재연을 마친 뒤 조사실을 나왔다. 박정기는 부산 집에 전화를 걸었다. 딸이 받았다. 차마 종철이 소식을 전할 수 없었다.

“은숙아, 염주하고 염불 책, 그라고 철이 사진 가져오그래이.”

그는 울먹였다. 울먹이다 저도 모르게 막내가 죽었다고 말해버릴 뻔했다. 박은숙은 동생의 사진을 가져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믿기지 않았다. 확인하고 싶었다.

“아부지! 아부지!”

수화기 너머에서 딸의 외침이 잦아드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전화를 끊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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