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월15일 오후 ‘박종철군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박군의 주검이 안치된 서울 성동구 홍익동 국립경찰병원 영안실에는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경찰병원은 91년 1월 ‘오욕의 홍익동 시대’를 마감하고 송파구 가락본동으로 옮겼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14
그 시절 고문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고문사건이 여론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두 해 전부터였다. 1985년 김근태(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는 남영동 대공분실 515호에서 고문기술자들에 의해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다. 김근태의 폭로로 고문기술자 김 전무(이근안)가 세상에 얼굴을 드러냈다. 7년 실형을 마치고 나온 뒤 목사로 변신한 이근안은 지난해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심문을 ‘고문이 아닌 예술’이라고 표현해 공분을 샀다.
86년엔 권인숙이 고문을 당했다. 서울대 휴학생인 권인숙은 경기도 부천의 한 공장에 위장취업하면서 허명숙이라는 가명을 쓰고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혐의로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는 문귀동 형사에 의해 이틀에 걸쳐 가혹행위와 성고문을 당했다.
해마다 터진 고문사건은 정권의 폭력성과 인권유린의 실상을 드러냈다. 게다가 이번 사건은 고문을 통해 한 청년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점에서 군부 권력의 부도덕성을 만천하에 폭로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박종철만의 사건이 아니었다. 이 땅 모든 ‘박종철들’의 사건이었다. 사건은 이미 보도지침으로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87년 1월16일치 신문부터 보도지침이 무력해지며 신문들은 앞다퉈 대서특필했다. 첫 보도에서 <중앙일보>에 뒤진 <동아일보>는 19일치 신문에서 박종철 사건을 1면 머리기사로 배치했다. 기자들은 안기부 등의 외압에 맞서며 진실을 추적했다.
15일 오후 석간신문에 첫 보도가 나가자 기자들이 경찰병원 영안실로 몰려들었다. 그들이 분향실에 들어서려 하자 경찰관들이 막았다. 기자 한 명이 분향실을 향해 소리쳤다.
“유가족 누구 없습니까?”
분향소를 지키던 박은숙이 일어섰다. 그들은 박은숙의 말을 수첩에 적었다.
“13일 밤 철이한테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하숙비를 좀 보내 달라고. 그런데 집에는 돈이 한푼도 없었거든요.”
박은숙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이때 박정기가 실성한 표정으로 나타나 기자들에게 외쳤다.
“뭐요? 뭘 알고 싶소? 왜 죽었는지 궁금한 기요? 우리 자식이 못돼서 죽었소.” 응급실에 실려가기 전 정차순의 울부짖음과 다르지 않은 말이었다. “내 아가 못돼서 죽었능교? 똑똑하면 다 못된 기요? 똑똑허믄 다 죽어야 되는 깁니껴?” 기자 한 명이 박정기에게 되물었다. “아드님이 왜 못됐다고 하십니까?” “이놈의 세상에선 똑똑하면 못된 기죠.” 박정기와 정차순의 말 속엔 독재권력에 대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지난해 초 그는 부산시장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정년퇴임을 1년 남짓 앞둔 때였다. 말단 공무원 생활 30여년 만에 시장실을 방문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시장은 아들 단속을 주문했다. “박 선생도 어렵게 자제가 그 좋은 대학(서울대)을 갔으니 학업에 열중하라고 꼭 가정에서 타이르시오.” 에둘러 한 말이었지만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구누구가 데모하는 아들을 뒀다는 이유로 국장 진급에서 탈락했다는 이야기는 공무원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들려왔다. 텔레비전만 켜면 화염병을 던지는 대학생들과 최루탄을 쏘는 전경들의 모습이 중계하듯 등장하던 시절이었다. 종종 아들의 입학식 때 본 서울대 정문도 보였다. 서울대는 시위가 가장 빈번한 학교였다. 그는 화면 속의 학생들 중에 혹여 아들이 있을까 노심초사했다. 다행히 운동권 학생으로 마포경찰서를 드나들던 큰아들과 달리 막내는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 안도하고 있었다. 그는 시장을 만난 뒤 아들에게 한번 더 다짐을 받아 두었다. 종철은 이번에도 그를 안심시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아들이 운동권 학생인 것을 모르고 있었다.
박종부는 응급실에 누워 있는 어머니 옆을 지키고 있었다. 어머니는 혼절하고 깨어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죽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밤 10시 무렵, 박정기는 박종부와 함께 염을 준비했다. 이튿날 아침 화장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는 카세트에 테이프를 꽂았다. 천수경이었다. 선친 박영복이 어린 딸을 보낼 때 그랬듯, 박정기는 제 손으로 자식의 옷을 수의로 갈아입히고 베로 감쌌다. 그는 염을 하는 동안 천수경을 외웠다. 독경 소리가 영안실 가득 울렸다.
그는 울음을 참으며 부검을 마친 아들의 몸을 정성 들여 염했다. 갓 태어난 아기를 씻길 때처럼 성을 다한 몸짓이었다. 그것은 아버지로서 아들을 보내기 위한 마지막 의식이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뭐요? 뭘 알고 싶소? 왜 죽었는지 궁금한 기요? 우리 자식이 못돼서 죽었소.” 응급실에 실려가기 전 정차순의 울부짖음과 다르지 않은 말이었다. “내 아가 못돼서 죽었능교? 똑똑하면 다 못된 기요? 똑똑허믄 다 죽어야 되는 깁니껴?” 기자 한 명이 박정기에게 되물었다. “아드님이 왜 못됐다고 하십니까?” “이놈의 세상에선 똑똑하면 못된 기죠.” 박정기와 정차순의 말 속엔 독재권력에 대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지난해 초 그는 부산시장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정년퇴임을 1년 남짓 앞둔 때였다. 말단 공무원 생활 30여년 만에 시장실을 방문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시장은 아들 단속을 주문했다. “박 선생도 어렵게 자제가 그 좋은 대학(서울대)을 갔으니 학업에 열중하라고 꼭 가정에서 타이르시오.” 에둘러 한 말이었지만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구누구가 데모하는 아들을 뒀다는 이유로 국장 진급에서 탈락했다는 이야기는 공무원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들려왔다. 텔레비전만 켜면 화염병을 던지는 대학생들과 최루탄을 쏘는 전경들의 모습이 중계하듯 등장하던 시절이었다. 종종 아들의 입학식 때 본 서울대 정문도 보였다. 서울대는 시위가 가장 빈번한 학교였다. 그는 화면 속의 학생들 중에 혹여 아들이 있을까 노심초사했다. 다행히 운동권 학생으로 마포경찰서를 드나들던 큰아들과 달리 막내는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 안도하고 있었다. 그는 시장을 만난 뒤 아들에게 한번 더 다짐을 받아 두었다. 종철은 이번에도 그를 안심시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아들이 운동권 학생인 것을 모르고 있었다.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