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 때인 1980년 11월 부산 금정산 범어사의 말사인 계명암에서 예불을 드리고 있는 박종철군. 그 시절 서강대 운동권인 형 박종부와 함께 아버지(박정기)의 외삼촌인 혜월 스님이 있던 계명암을 찾아 머리를 식히곤 했다.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18
1979년 10월16일부터 닷새 동안 부산과 마산 일대에서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저항한 부마항쟁이 거세게 타올랐다. 부마항쟁은 유신정권을 역사에서 밀어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날 막내 철(종철)이는 학원 수강을 마치고 오는 길에 시위대를 발견했다. 막내는 집에 들러 교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더니 시위대를 찾아 나섰다. 한 여학생과 함께 시위대를 종일 따라다녔다. 여학생은 어릴 때부터 항상 손을 잡고 다닌 단짝 친구로 철이보다 한 살 어린 가구점집 딸이었다.
막내는 남포동에서 서면까지 행진하며 ‘유신철폐’, ‘독재타도’ 구호를 외쳤다. 그날 나(박정기)도 우연히 시위대를 만났다. 전경들이 자갈치시장 근처에서 최루탄을 쏘며 시위대를 진압했다. 나는 그날 최루탄을 처음 보았다.
내가 귀가할 때까지 막내가 집에 오지 않았다. 아내는 막내를 걱정했다. 늘 일정하던 귀가시간이 지나도록 오지 않은 것이다. 막내는 최루탄을 잔뜩 뒤집어쓴 채 밤늦게야 들어왔다. 얼굴은 눈물 콧물에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누나 은숙이 놀리자 억울한 듯 말했다.
“마이 잘못되고 있는 것 같데이. 그러이 형들이 위험한 데모를 하는 거 아이겠나?”
철이는 그날 최루탄 파편에 맞아 피흘리며 쓰러진 시민들을 보았다. 아내는 이날 일의 원인을 형 종부가 가져온 책에 있다고 생각했다. 집엔 방학 때 종부가 두고 간 <전환시대의 논리>와 경제학자 박현채 선생의 책 등이 있었다. 중학생인 막내는 형의 책들을 다 읽었다. 아내는 막내가 그 책을 읽고 부마항쟁 때 뛰쳐나간 거라며 종부를 나무랐다.
철이는 그날 시위와 군중들을 보고 많은 의문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시민을 지켜주어야 할 경찰이 왜 최루탄을 쏘고 사람들을 때리는지 의아했을 것이다. 그 일이 아이의 의식에 남긴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무렵 형 종부가 잠시 집에 내려왔다. 철이는 부마항쟁 때 겪은 일들을 들려주며 형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해댔다.
서강대 77학번인 종부는 운동권 학생이었다. 학내 동아리 ‘가톨릭학생회’에서 활동했다. 특히 멕시코 출신의 신부인 빌라레알 펠릭스 교수와 가까웠는데, 그분 전공이 해방신학이었다. 신부는 박사학위만 7개를 딴 천재로 서강대 전자계산학과를 설립한 분이기도 했다. 종부는 신부에게 해방신학을 배우며 현장 활동을 했다. 용산시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지내며 밥차를 운영하고, 짐꾼들과 함께 새벽시장에서 리어카로 짐을 나르는 일을 도왔다. 그는 농활이나 그런 동아리 활동을 철이에게 종종 들려주었다. 훗날 종부는 가톨릭학생회 회장을 맡았다가 무기정학을 받았다. 회장을 맡는 동안 중앙정보부 요원 두 명이 늘 따라다니며 등하교를 함께 하기도 했다. 철이의 얘기를 듣던 종부는 막내를 포장마차로 데려갔다. 형은 어린 동생에게 소주를 따라주며 얘기를 시작했다. 철이는 이성 문제로 겪는 고민을 털어놓았고,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은 감상을 얘기했다. 부마항쟁을 겪으며 사회와 역사에 대한 관심이 깊어진 철이의 질문에 종부는 중학생 수준에 맞춰 고민을 풀어주었다. 부마항쟁이 왜 일어났고, 유신체제가 무슨 문제가 있는지 등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날 형제는 포장마차에서 소주 여섯 병을 나눠 마셨다. 중학교 3학년의 미성년이었던 철이는 취하지도 않고 잘 마셨다. 종부보다 술을 더 잘 마셨다고 한다. 녀석들은 나와 식구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동네 슈퍼에서 초콜릿을 사먹고 들어왔다. 아이들은 나를 닮아 술을 잘 마시고, 또 아무리 마셔도 얼굴색이 변하지 않는 체질이라 냄새만 없애면 감쪽같이 속을 수밖에 없었다. 80년 3월, 철이는 부산의 책방 골목으로 유명한 보수동의 혜광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아이의 주변엔 항상 친구들이 들끓었다. 막내는 친구 사귀기를 좋아했다. 방과후면 친구들이 우리집에 몰려오곤 했다. 아내는 아무리 많이 찾아와도 먹거리를 챙겨주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이듬해 81년 3월, 종부가 군에 입대하며 논산훈련소로 떠났다. 군 입대 결정은 나와 아내의 불안 때문이었다.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이후 학원가는 공포스런 분위기였다. 종부는 신군부가 비상계엄령을 전국에 확대한 직후인 80년 5월18일 새벽, 하숙집에서 경찰에 연행되었다. 학생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다 도피할 때였는데 공무원인 아버지에게 피해가 있을까 걱정되어 집에 있었다고 한다. 종부는 두 달 동안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나는 서울에 올라갔지만 면회가 허락되지 않아 책과 내의, 국밥을 사서 넣어주고 돌아왔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서강대 77학번인 종부는 운동권 학생이었다. 학내 동아리 ‘가톨릭학생회’에서 활동했다. 특히 멕시코 출신의 신부인 빌라레알 펠릭스 교수와 가까웠는데, 그분 전공이 해방신학이었다. 신부는 박사학위만 7개를 딴 천재로 서강대 전자계산학과를 설립한 분이기도 했다. 종부는 신부에게 해방신학을 배우며 현장 활동을 했다. 용산시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지내며 밥차를 운영하고, 짐꾼들과 함께 새벽시장에서 리어카로 짐을 나르는 일을 도왔다. 그는 농활이나 그런 동아리 활동을 철이에게 종종 들려주었다. 훗날 종부는 가톨릭학생회 회장을 맡았다가 무기정학을 받았다. 회장을 맡는 동안 중앙정보부 요원 두 명이 늘 따라다니며 등하교를 함께 하기도 했다. 철이의 얘기를 듣던 종부는 막내를 포장마차로 데려갔다. 형은 어린 동생에게 소주를 따라주며 얘기를 시작했다. 철이는 이성 문제로 겪는 고민을 털어놓았고,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은 감상을 얘기했다. 부마항쟁을 겪으며 사회와 역사에 대한 관심이 깊어진 철이의 질문에 종부는 중학생 수준에 맞춰 고민을 풀어주었다. 부마항쟁이 왜 일어났고, 유신체제가 무슨 문제가 있는지 등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날 형제는 포장마차에서 소주 여섯 병을 나눠 마셨다. 중학교 3학년의 미성년이었던 철이는 취하지도 않고 잘 마셨다. 종부보다 술을 더 잘 마셨다고 한다. 녀석들은 나와 식구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동네 슈퍼에서 초콜릿을 사먹고 들어왔다. 아이들은 나를 닮아 술을 잘 마시고, 또 아무리 마셔도 얼굴색이 변하지 않는 체질이라 냄새만 없애면 감쪽같이 속을 수밖에 없었다. 80년 3월, 철이는 부산의 책방 골목으로 유명한 보수동의 혜광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아이의 주변엔 항상 친구들이 들끓었다. 막내는 친구 사귀기를 좋아했다. 방과후면 친구들이 우리집에 몰려오곤 했다. 아내는 아무리 많이 찾아와도 먹거리를 챙겨주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이듬해 81년 3월, 종부가 군에 입대하며 논산훈련소로 떠났다. 군 입대 결정은 나와 아내의 불안 때문이었다.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이후 학원가는 공포스런 분위기였다. 종부는 신군부가 비상계엄령을 전국에 확대한 직후인 80년 5월18일 새벽, 하숙집에서 경찰에 연행되었다. 학생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다 도피할 때였는데 공무원인 아버지에게 피해가 있을까 걱정되어 집에 있었다고 한다. 종부는 두 달 동안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나는 서울에 올라갔지만 면회가 허락되지 않아 책과 내의, 국밥을 사서 넣어주고 돌아왔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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