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교육

[길을찾아서] 종부 체포·아버님 별세·사기·종철 낙방…잇따른 불행 / 박정기

등록 2011-12-29 19:53

1988년 5월 서강대 교정의 의기촌에 세워진 김의기 열사 추모비. 김 열사는 80년 5월30일 서울 기독교회관 6층에서 광주의 진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뿌리고 투신했다. 당시 서강대 운동권이었던, 박정기씨의 큰아들 박종부씨도 ‘서강대 유인물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다.
1988년 5월 서강대 교정의 의기촌에 세워진 김의기 열사 추모비. 김 열사는 80년 5월30일 서울 기독교회관 6층에서 광주의 진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뿌리고 투신했다. 당시 서강대 운동권이었던, 박정기씨의 큰아들 박종부씨도 ‘서강대 유인물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다.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19
1980년 5월18일 새벽 경찰에 끌려갔다가 두달 만에 나온 맏이 종부는 그해 11월 ‘서강대 유인물 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다시 연행되었다. 서강대 도서관 옥상에서 학생들이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뿌린 사건 때문이었다. ‘5·18’ 이후 학생들은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신군부의 언론 통제로 광주의 진상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5월30일 서강대 무역학과 재학생 김의기가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뿌린 뒤 투신·사망했다. 이 글은 시민들의 분노와 저항을 요청하고 있었다.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공포가 우리를 짓눌러 우리의 숨통을 막아 버리고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 우리를 번득이는 총칼의 위협 아래 끌려 다니는 노예로 만들고 있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김의기는 서강대 운동권의 핵심이었다. 그의 2년 후배로 가깝게 지냈던 종부를 비롯해 동료 학생들은 이후 광주를 알리는 유인물을 배포하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벌였다. 다행히 종부는 조사 과정에서 주동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 한달 만에 풀려났다. 연거푸 맏이가 경찰에 끌려가는 일이 생기자 나(박정기)와 아내는 불안해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대학생 부모들을 불안하게 하는 소문들이 너무 많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종부를 설득해 휴학을 시키고 입영 절차를 밟았다.

81년 3월 형이 군에 입대하던 날, 막내 철이(종철)는 내내 울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짠한 감정이 들면서도 우애가 남다른 형제를 자식으로 두고 있다는 생각에 든든하기도 했다.

종부가 훈련소에 입소한 지 두달쯤 뒤 아버지(박영복)가 돌아가셨다. 향년 일흔넷이었다. 아버지는 그때까지 동래의 고향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셨다. 일제 때 도쿄 유학까지 했던 지식인이었지만 철이가 보고 자란 할아버지는 오로지 농사꾼이었다. 아버지는 논일을 하던 중 쓰러져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평소 감기 한번 걸리지 않을 만큼 건강한 분이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아버지는 손주 철이를 각별히 아끼고 귀여워했다. 형도 떠난데다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시니 막내는 몹시 허전해했다. 종부에게는 할아버지의 별세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그렇잖아도 어렵게 군 생활을 하는 아이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불행한 일은 연달아 터진다고 했던가. 직접 지은 서대신동의 3층집에서 5년을 산 뒤 우리는 같은 동네의 한옥으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집을 철거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도시계획에 따라 그 자리에 도로를 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새 집을 마련할 돈을 대출하기 위해 상호부금에 가입했는데 그만 사기를 당했다. 은행에선 두 사람의 맞보증을 전제로 대출해줬는데, 은행 소개로 맞보증을 섰던 어떤 할머니가 돈을 들고 일본으로 도망가버린 것이었다. 수십명이 이런 방식으로 그 할머니에게 당했다. 당시 언론에도 알려질 만큼 유명한 사기사건이었다. 나는 그 할머니가 대출한 돈까지 갚아야 했다. 앞이 막막한 피해자들이 모여 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했지만 패소했다.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다.

그렇게 알거지가 된 우리는 영도구 청학동의 양수장 사택으로 들어갔다. 다시 관사에서 지내는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여기서 87년 은퇴할 때까지 살았다.


철이가 입시를 앞둔 고3이 되었지만 살림이 기울어 뒷바라지가 어려웠다. 우리는 아이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막내가 어려운 집안 형편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불평 한번 하지 않고 공부에 매진했다. 너무 열심히 하는 게 걱정된 아내가 “공부 좀 그만하고 나가서 놀아라”고 할 정도였다.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막내는 학교에 맨 먼저 등교해 도서관 문을 열었고 마지막으로 불을 끄고 나왔다. 우리집에서 멀리 혜광고가 보여서, 도서관의 불이 꺼지면 아내가 마중을 나갔다. 두 사람은 중간쯤 길목에서 만나 다정하게 얘길 나누며 돌아오곤 했다.

82년말 학력고사를 본 철이는 가고 싶은 서울대 사회대 대신 안정적인 지원을 한다며 인문대 사학계열에 응시했다. 하지만 결과는 낙방이었다. 막내는 몹시 실망했다. 나는 아들을 격려하며 재수생활을 뒷받침해 주겠다고 말했다. 철이도 한번 더 도전하고 싶어했다.

83년 철이는 서울로 올라가 객지생활을 시작했다. 친구 김치하의 누나 댁에서 지내며 종로학원을 다녔다. 녀석은 간간이 집으로 편지를 부쳤다. 어려운 형편을 알아서인지 편지엔 미안한 마음이 자주 담겨 있었다. 나는 매번 철이가 청한 액수보다 많은 금액을 부쳐주었다. 그해 여름 군에서 제대한 종부가 복학을 준비하며 서울로 올라갔다. 이때부터 형제는 함께 하숙하며 지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