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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길을찾아서] 농민부담 안주려…농활 가 새참 안먹은 종철 / 박정기

등록 2012-01-02 20:00

1984년 서울대 언어학과에 입학한 막내아들 박종철은 입학 두달 남짓 만인 5월18일 거리시위를 나서려다 처음으로 경찰에 연행됐다. 그해 5월 서울대 관악캠퍼스 정문에서 ‘광주학살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학생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고 있다. 
 서울대 누리집 갈무리
1984년 서울대 언어학과에 입학한 막내아들 박종철은 입학 두달 남짓 만인 5월18일 거리시위를 나서려다 처음으로 경찰에 연행됐다. 그해 5월 서울대 관악캠퍼스 정문에서 ‘광주학살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학생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고 있다. 서울대 누리집 갈무리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21
1980년대 대학을 다닌 학생들은 그랬다. 대학생들에게 ‘열사’라는 호칭은 한편 가슴 뛰게 하고, 한편 부끄럽게 하는 말이었다.

내 아들 철이(박종철)를 비장하게 만든 이름. 전태일!

전태일을 따르기 위해 철이는 자신의 일을 뒤로 제치고 집회에 참여하고 하루하루 깨어나는 청년이 되고 싶었다. 나(박정기)는 솔직히 87년 이전엔 전태일이 누군지 몰랐다. 전태일을 알게 된 것은 아들이 떠나고 나서였다. 나는 철이가 떠난 뒤 바로 그 책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사서 읽었고, 그 후로도 짬짬이 읽었다. 아들을 이해하기 위해, ‘박종철을 따르기 위해’ 나는 읽고 또 읽었다.

전태일의 삶과 죽음은 나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나는 그 전까지 책을 읽고 나서 무엇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 책은 이상하게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거라고 생각하게 했다.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사실 우리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에서는 ‘열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자식이고, 딸이고, 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식들은 투사가 아니고, 열사가 아니다. 다만, 인간을 사랑한 존재였다. 또한 자식들이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난 것이 아니라 언제나 곁에 살아있기 때문에 열사일 수 없다. 그래서 이소선 어머니는 ‘전태일 열사’라는 말을 못마땅해하며 ‘전태일 동지’로 불러달라고 말한 것이다.

막내 철이가 처음 경찰서에 연행된 것은 84년 5·18 시위 때였다. 5·18은 말해선 안 되는 금기의 언어였다. 하지만 학생들은 대자보와 유인물을 통해 광주를 알렸다. 대자보를 통해 광주를 본 철이는 자신이 직접 겪은 부마항쟁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해 5월18일,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들과 함께 아들은 거리시위에 참여했다. 장소는 종로의 파고다공원이었다. 철이는 파고다공원에 가지 못하고 경찰에게 붙잡혔다. 경찰들이 교문 앞에서 이미 시위에 참여할 기미가 보이는 학생들을 연행하고 있었다. 항의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들은 닭장차에 실려 관악경찰서로 끌려갔다. 이 일은 종부 외에 우리 식구 누구도 알지 못한 채 지나갔다.

그해 여름방학 때 철이는 농촌활동(농활)에 참여했다. 농활은 충청북도 영동군 옥계리에서 열렸다. 언어학과의 한 여학생도 함께 데려갔다. 건강 문제로 망설이는 여학생을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말로 설득한 것이다. 철이는 여학생에게 이런 말을 했다.

“몸이 닳도록 노력한 대가치고는 너무도 박한 대가가 농민들에게 주어지고, 그래서 도시에서 누리는 각종의 혜택으로부터 소외된 기 그들 아이가?”

정부는 농민들에게 농활대를 받아들이지 않도록 회유하고 협박했다. 반체제 의식을 갖게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농활 도중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농활의 원칙, 한 가지는 새참을 먹지 않는 것이었다. 농민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그런데 농민들에게 새참은 빠뜨릴 수 없는 문화라 새참 거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새참을 주려는 농민들과 거부하는 농활대 사이에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자 토론이 벌어졌다.

“농활의 목적은 농민을 깊이 이해하고 유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참을 먹으며 농민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으로 활용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런 어려움은 이미 예상한 것입니다. 끈기 있게 농민들을 설득한다면 새참 거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철이는 새참을 거부하는 쪽이었다. 토론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토론을 마친 뒤 곤란한 일이 생겼다. 마을 아주머니가 국수를 말아 온 것이다. 농활대는 정중히 새참을 거절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새참을 먹지 않으면 국수가 불어터져 버릴 수밖에 없다며 요지부동이었다. 마지못해 새참을 받았다. 철이만이 홀로 밭에 남아 계속 김을 맸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훗날 이 얘기를 전해들으며 원칙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성격이 지 애비를 닮은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농활 기간 중 하루는 철이의 권유로 참여한 여학생이 위경련을 일으켰다. 모두 잠에 빠져들었을 때였다. 신음소리를 듣고 일어난 아들은 밤새 여학생을 간호했다. 수건을 머리에 얹어 주기도 하고, 배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추위에 떠는 학생을 위해 군불을 때 주기도 하며 아침을 맞이했다. 녀석의 정성 덕분인지 새벽이 되자 여학생의 위경련이 가라앉았다. 농촌활동을 마치고 철이는 부산행 통일호 기차에 몸을 실었다. 집에 도착한 것은 밤이 이슥할 무렵이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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