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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길을찾아서] ‘서울대 프락치사건’ 항의하며 중간고사 거부 주도 / 박정기

등록 2012-01-03 19:41

1984년 10월28일 이른바 ‘프락치(가짜 대학생) 폭행사건’에 대한 무리한 탄압에 항의한 학생들의 중간고사 거부 투쟁 때 서울대 도서관 앞에 전투경찰들이 진주해 있다. 박종철은 당시 언어학과를 대표해 시험거부를 주도했다.  사진 서울대 누리집 갈무리
1984년 10월28일 이른바 ‘프락치(가짜 대학생) 폭행사건’에 대한 무리한 탄압에 항의한 학생들의 중간고사 거부 투쟁 때 서울대 도서관 앞에 전투경찰들이 진주해 있다. 박종철은 당시 언어학과를 대표해 시험거부를 주도했다. 사진 서울대 누리집 갈무리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22
1984년 여름 어느날 초인종 소리에 아내(정차순)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아내는 문밖에 선 막내 철이(박종철)를 보고 깜짝 놀랐다. 갑작스런 귀가였다.

“아이구, 이노마야. 연락 좀 미리 주고 오면 어디 병난다 카드나?”

“엄마 깜짝 놀라게 해줄라꼬 그랬지예.”

막내의 얼굴은 햇볕에 타 가무잡잡하고 옷은 해져 있었다. 모자는 마주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농사일은 힘들지 않드나?”

“지가 한 일은 일 축에도 못 낍니더. 그란 일을 매일 하는 사람도 있는데예.”

나(박정기)와 아내는 농활이란 게 자원봉사 같은 것인 줄 알았다. 우리 가족은 모처럼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나는 밥상을 물리고 입을 열었다. 얼마 전 확인한 첫 학기 성적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사경고가 표기된 성적표를 본 나는 기가 막혔다. 학생으로서 최소한의 성실함을 잃은 행동이었다.

“철아, 니 학사경고가 뭐나? 재수까지 시켜 대학 보냈는데 첫 학기부터 이런 거 받아야 쓰겠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내와 누나 은숙도 걱정스런 눈빛을 보탰다.

“글케 공부가 어렵드나?”

“아입니더. 그기 지가 해야 할 공부의 전부는 아니라 좀 게을리 했심니더. 배울 게 너무 많심니더.”

무슨 공부가 더 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 앞에선 항상 진실했던 막내라 더 나무라진 않았다.

“담부턴 더 분발해야 한데이.”

“앞으론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노력하겠심더.”

철이는 뭘 한다고 하면 지독하게 했다. 그래서 나는 아들을 믿었다. 며칠 뒤 철이는 친구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학사경고를 받은 것을 운동을 열심히 했다는 이유로 변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다음엔 학과 공부도 열심히 해서 좋은 점수를 받을 테니 두고 봐라.”

철이는 부산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동안 내내 아내 곁에 붙어 있다시피 했다. 은숙에게는 ‘해방춤’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철이가 가입한 대학문화연구회에선 방학 중에 산행훈련을 했다. 나흘 동안 텐트를 치고 노숙하며 매일 산을 타는 일이었다. 이 훈련은 학생들 간의 연대감을 형성하기 위한 활동으로, 당시 대부분의 이념서클에서 빠지지 않는 프로그램이었다. 그해의 훈련 장소는 경북 영천의 보현산 일대였다.

2학기 들어서면서 시위는 한층 격렬해졌다. 거리시위 횟수도 늘었다. 철이는 부쩍 늘어난 집회와 시위에 여전히 빠짐없이 참여했다. 대학생활은 마음의 여유 없이 긴박하게 흘러갔다.

그러면서도 철이는 시위 현장에서 저도 모르게 솟구치는 격렬한 분노가 두렵고 낯설었다. 갑자기 다가온 낯선 세계에서 혼란스러웠다. 부모에게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도 버거웠을 것이다. 애비의 바람과 아들의 바람이 내면에서 충돌했다.

철이는 그즈음 사귀던 여자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고뇌에 빠진 자신을 고백하는 글이었다.

“미완의 자아로서 또다른 나를 형성하기에는 현재의 나로서는 너무나 벅찬 것 같다.”

철이는 자신을 가둔 알을 깨뜨리고 새로운 세계 속으로 나아갔지만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데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어떻게 날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학생운동을 계속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갈등했다.

아들은 2학기 중간고사를 거부했다. 시험거부의 발단은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었다. ‘프락치’는 대학 내에서 학생들의 동향을 보고하는 정보원들인 ‘가짜 대학생’을 이르는 말이다. 정부는 프락치 사건을 통해 학도호국단 대신 건설한 서울대 총학생회를 불법 폭력조직으로 몰아세우고, 와해시키려 했다. 철이는 이에 맞서 언어학과에서 시험거부 투쟁을 주도했다.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이로 인해 기말고사에서 성적을 보충해야 했다. 새벽엔 일찍 도서관에 가고 거리시위가 있을 땐 책을 덮고 거리로 나갔다. 시위를 마치면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가 책을 펼쳤다.

그해가 서서히 저물어가는 11월 중순, 철이는 거리시위를 마치고 관악산 골짜기의 한 막걸릿집에서 언어학과 학생들과 술자리를 했다. 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아들은 한 선배를 부둥켜안고 오열했다.

“형!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답게 살아보는 것이 이렇게 힘들어야만 해요? 물러설 수야 없지만 너무도 힘이 들어요.”

자리를 함께한 학생들은 모두 놀랐다.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철이는 평소 맡은 일을 묵묵히 해내며 친구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아이였다. 친구들은 철이가 저 홀로 괴로움 속에 놓여 있는 줄 몰랐을 것이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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