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5월23일 서울 광화문 미국문화원을 점거한 전국학생총연합 산하 삼민투 소속 대학생 73명이 72시간 만인 5월26일 낮 12시5분 농성을 끝낸 뒤 자진해서 나오고 있다. 박종철씨는 농성을 지지하는 거리시위에 나갔다가 연행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24
1985년 4월30일에 막내 철이(박종철)가 보낸 편지엔 이런 내용도 담겨 있다.
“제가 생각하기에 옳다고 판단되는 일에는 항상 소신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 나가겠습니다. … 아버지 어머니,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은 결코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 땅의 잘못된 정치경제적 구조가 만들어낸 역사적 산물입니다.”
그해 5월24일 서울대·연세대·고려대·성균관대 등 서울지역 대학생 73명이 미국문화원을 점거했다. 농성은 72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농성 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한 집회가 열렸다. 집회 장소는 시청 앞과 사당동 두 곳이었다. 철이가 활동한 대학문화연구회는 사당동 집회에 참여했다. 이날 사당동 집회의 전체 지휘자는 철이가 존경하는 서클 선배였다. 학생들은 학교별, 단과대별로 다른 길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 모여들었다. 철이는 가방 속에 화염병을 넣고 도착했다.
전투조 학생들은 시위대를 빙 둘러싸고 보호하는 것이 임무였다. 철이는 2학년생들 중 유일하게 방어 전투조를 자청했다. 확성기의 사이렌 소리와 함께 학생들이 도로로 뛰어들며 외쳤다.
“미국은 공개 사과하라!”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주동자는 육교 위에 올라 성명서를 읽었다. 시위대는 구호를 외치고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었다. 방패를 든 전경들이 몰려들었고 최루탄을 쏘았다. 학생들과 전경들이 충돌했다. 학생들은 보도블록을 깨서 돌을 던졌고 화염병을 투척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승용차 한 대가 불탔다.
시위대가 해산을 시작했다. 철이는 후미에서 전경들과 대치했다. 시위대를 방어하던 중 시위 지휘자인 선배가 위험한 곳에 있는 모습을 본 철이는 거의 강제로 그를 대피시켰다. 아들은 어느 순간 시위대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되었고, 갑자기 달려든 사복경찰에 연행되었다.
이날의 가두 투쟁으로 철이는 남부경찰서 유치장에서 닷새 동안 구류를 살았다. 유치장에서 나온 지 사흘 만에 아들은 다시 경찰서에 연행되었다. 6월1일 ‘구로지역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연합’ 결성식에 즈음한 집회에서였다. 이때는 즉심 재판을 받고 사흘 동안 구류를 살았다. 친구들은 집회 때마다 경찰에 연행되는 철이에게 ‘억세게 재수없는 싸움꾼’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해 5월 어느 날 언어학과 수련회(엠티)가 있었다. 그 시절 대학가의 5월은 저항의 달이었다. 아들은 서울대 교문 투쟁에 참여한 뒤 과 선배와 함께 뒤늦게 버스를 타고 엠티 장소를 찾아갔다. 두 사람이 도착하자 방 안에 있던 학생들이 연신 재채기를 해댔다. 몸에 묻혀 온 최루탄 때문이었다. 한바탕 소동이 끝난 뒤 함께 온 선배가 학생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2학년생 과 학회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과마다 여러 학회가 있었지만 실제 학습의 내용은 한국 사회의 현실을 다루는 것으로 대동소이했다. 제안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찬반 의견이 팽팽했다. 회의가 길어지자 몇몇 학생의 얼굴에서 지루한 표정이 묻어났다. 그때 한 학생이 말했다. “오랜만에 이렇게 모였으니 딱딱한 토론은 그만두고 디스코클럽에 가서 즐겁게 노는 게 어때요?” 철이의 얼굴은 금세 일그러졌다. “일단 하던 얘길 마무리 짓고 놀아도 되지 않겠나? 그라고 우리가 꼭 그란 데 가서 놀아야 되겠나?”
토론에 지친 학생들은 하나둘 자리를 떴다. 결국 철이와 학회 결성을 제안한 선배 둘만이 방에 남아 허탈한 심정을 서로 달랬다.
그해 5월을 거치며 학생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힌 전두환정권은 학생운동 탄압을 한층 강화했다. 여름방학이 되자 철이는 자취방을 안양으로 옮겼다. 자취방을 빌려 쓴 선배들이 수배당하거나 검거되었기 때문이다. 선배들은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 산하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 투쟁위원회’(삼민투)에 소속되어 있었다.
방학 동안 아들은 보름 동안 공장활동(약칭 공활)을 했다. 공활은 학생들이 공장에 취직해 직접 노동자의 생활을 체험하는 활동이다. 철이는 서클에서 미리 노동법 등을 학습한 뒤 자신이 일할 공장을 찾아다녔다.
8월2일 철이는 대림동의 영세한 공장인 ‘세왕전기’에서 사장과 간단하게 면접을 한 다음 일당 3500원을 받기로 하고 일을 시작했다. 25평 남짓한 공간에서 사장과 공장장 말고 6명이 일하는 소규모 공장이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이날의 가두 투쟁으로 철이는 남부경찰서 유치장에서 닷새 동안 구류를 살았다. 유치장에서 나온 지 사흘 만에 아들은 다시 경찰서에 연행되었다. 6월1일 ‘구로지역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연합’ 결성식에 즈음한 집회에서였다. 이때는 즉심 재판을 받고 사흘 동안 구류를 살았다. 친구들은 집회 때마다 경찰에 연행되는 철이에게 ‘억세게 재수없는 싸움꾼’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해 5월 어느 날 언어학과 수련회(엠티)가 있었다. 그 시절 대학가의 5월은 저항의 달이었다. 아들은 서울대 교문 투쟁에 참여한 뒤 과 선배와 함께 뒤늦게 버스를 타고 엠티 장소를 찾아갔다. 두 사람이 도착하자 방 안에 있던 학생들이 연신 재채기를 해댔다. 몸에 묻혀 온 최루탄 때문이었다. 한바탕 소동이 끝난 뒤 함께 온 선배가 학생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2학년생 과 학회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과마다 여러 학회가 있었지만 실제 학습의 내용은 한국 사회의 현실을 다루는 것으로 대동소이했다. 제안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찬반 의견이 팽팽했다. 회의가 길어지자 몇몇 학생의 얼굴에서 지루한 표정이 묻어났다. 그때 한 학생이 말했다. “오랜만에 이렇게 모였으니 딱딱한 토론은 그만두고 디스코클럽에 가서 즐겁게 노는 게 어때요?” 철이의 얼굴은 금세 일그러졌다. “일단 하던 얘길 마무리 짓고 놀아도 되지 않겠나? 그라고 우리가 꼭 그란 데 가서 놀아야 되겠나?”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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