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4월28일 서울대생 김세진(자연대 학생회장)·이재호(전방입소 훈련 전면거부 및 한반도 미제 군사기지화 결사저지를 위한 특별위원회 공동부위원장)씨가 서울 신림동 사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다 각각 분신·투신했다. 사진은 5월30일 서울대에서 열린 두 열사와 5월20일 학생회관에서 분신사망한 이동수씨의 합동장례식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27
1986년 4월 청계피복노조와 노학연대 시위 때 체포된 철이(박종철)는 서울 성동구치소에서 청계노조 위원장 황만호와 ‘통방’을 통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두번째 징역살이를 하는 황 위원장은 감옥생활을 의미있게 보내야 한다며, 많은 사람을 사귀고 운동을 해서 건강하게 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 말을 듣고 철이는 전과 달리 요가·단전호흡·평행봉 등을 규칙적으로 했다.
황만호에게 철이는 겸손한 청년이었고, 감옥에서도 공부에 매진하는 학생이었다. 아들의 방엔 항상 책이 가득해서 그가 자주 빌려 읽었다. 철이는 구치소를 떠나던 날 그의 감방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황만호 위원장님, 저 먼저 나갑니더!”
황만호가 화답했다.
“바깥에서 우리 꼭 만나자!”
그러나 두 사람은 다시 만날 수 없었다. 황만호는 그때 실형을 선고받고 안동교도소에 수감중이던 87년 1월 철이 소식을 들었다. 그는 김병곤 등과 논의해 옥중 시위를 벌였다. 그날 밤 안동교도소의 수감자들은 한목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종철이를 살려내라!” “독재정권 타도하자!”
황만호는 87년 5월 만기 출소했다. 세상은 ‘6월항쟁’의 열기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철이의 뜻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청계노조 조합원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해 “종철이를 살려내라!”고 외쳤다. 그는 해마다 1월이면 박종철 추도식에 거의 빠짐없이 참여하고 있다. 그는 철이와 함께 지낸 시간을 회고하며 말했다.
“철이가 있었기에 이만큼이나마 민주화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너무 착하고 겸손한 청년이었어요. 수줍게 웃던 모습이 그리워요. 더 나은 세상을 이룩하는 데 제 몫을 다할 친구였는데 일찍 떠나 안타깝습니다.” 철이는 구치소에서도 우리에게 책을 넣어 달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일반언어학 서설>, <고요한 돈강>, <해방후 40년의 재인식>, <한국 사회의 재인식>, <소비에트 이데올로기 1, 2>, <러시아혁명사>, <한국 근대 경제사 연구> 등이었다. 불온서적으로 보여서 나(박정기)는 일부러 책을 넣어주지 않았다. 86년 4월말 철이는 한 수감자를 통해 서울대생 김세진과 이재호의 분신 소식을 들었다. 그날 아들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을 삼켰다. 아들이 김세진을 만난 것은 85년 5월 관악경찰서에서 구류를 살 때였다. 두 학생은 유치장에서 통성명한 뒤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숨죽인 채 대화를 나누었다. 아들이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86년 봄이었다. 신림동의 어느 서점 앞에서 만난 두 사람은 안부를 주고받았다. 헤어질 때 김세진이 망설이듯 말했다. “종철아, 앞으로 우리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대 학생회장에 선출된 김세진의 당선소감이 대자보로 붙었다. 철이는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을 학생회장이 되면 바빠진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4월28일, 김세진은 신림사거리 가야쇼핑센터 앞에서 서울대 85학번 학생들과 함께 구호를 외쳤다. “반전반핵 양키고홈!”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
김세진과 이재호는 3층 건물 옥상 위에서 구호를 선창했다. 두 사람은 경찰들을 향해 다가오지 말 것을 요청했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고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그것이 두 청년의 죽음을 불렀다. 이재호는 옥상에서 1층으로 떨어져 내렸고, 김세진은 시너를 몸에 붓고 옥상에서 화염에 휩싸인 채 쓰러졌다. 김세진은 5월3일, 이재호는 5월26일 끝내 눈을 감았다.
김세진은 4월26일 부모님께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다짐했다.
“사랑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해방된 조국의 땅에서 자랑스러운 아들임을 가슴 뿌듯하게 느낄 때가 반드시 올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의 투쟁 속에서 그날을 앞당길 것입니다.”
철이는 한동안 넋을 잃은 듯 지내다 5월12일 집으로 편지를 보냈다. 5월8일 어버이날 쓴 이 편지는 구치소에서 온 편지 중 우리 부부가 가장 반갑게 읽은 것이다.
“여기 있는 동안에 지난 일들에 대해서는 충분히 돌이켜보고 반성도 하여 나가서는 부모님이 원하시는 막내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어버이날을 올해는 이렇게 보냈군요. 죄송합니다. 어버이날 하루만을 치장하는 겉치레 효성보다는 항상 간직할 수 있는 효성이 더 좋겠지요. 그렇게 노력하겠습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철이가 있었기에 이만큼이나마 민주화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너무 착하고 겸손한 청년이었어요. 수줍게 웃던 모습이 그리워요. 더 나은 세상을 이룩하는 데 제 몫을 다할 친구였는데 일찍 떠나 안타깝습니다.” 철이는 구치소에서도 우리에게 책을 넣어 달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일반언어학 서설>, <고요한 돈강>, <해방후 40년의 재인식>, <한국 사회의 재인식>, <소비에트 이데올로기 1, 2>, <러시아혁명사>, <한국 근대 경제사 연구> 등이었다. 불온서적으로 보여서 나(박정기)는 일부러 책을 넣어주지 않았다. 86년 4월말 철이는 한 수감자를 통해 서울대생 김세진과 이재호의 분신 소식을 들었다. 그날 아들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을 삼켰다. 아들이 김세진을 만난 것은 85년 5월 관악경찰서에서 구류를 살 때였다. 두 학생은 유치장에서 통성명한 뒤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숨죽인 채 대화를 나누었다. 아들이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86년 봄이었다. 신림동의 어느 서점 앞에서 만난 두 사람은 안부를 주고받았다. 헤어질 때 김세진이 망설이듯 말했다. “종철아, 앞으로 우리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대 학생회장에 선출된 김세진의 당선소감이 대자보로 붙었다. 철이는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을 학생회장이 되면 바빠진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4월28일, 김세진은 신림사거리 가야쇼핑센터 앞에서 서울대 85학번 학생들과 함께 구호를 외쳤다. “반전반핵 양키고홈!”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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