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청은 거센 비판여론에 밀려 1987년 1월19일 ‘박종철군 치사사건’에 대한 자체 조사 결과 발표를 하고 고문 당사자로 조한경·강진규 경감을 지목했다. 경찰은 이날 구속영장이 발부된 두 경관의 얼굴을 숨기고자 똑같은 복장으로 위장한 경찰관 20명과 함께 서울 서대문구치소에 이감하는 촌극을 벌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34
1987년 1월16일 ‘서울대생 박종철군 치사사건’이 보도된 이후 언론의 집중보도로 궁지에 몰린 경찰은 더이상 고문 사실을 감출 수 없었다. 1월19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경찰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날 강민창은 고문 상황을 재연했다. 그는 두 수사관이 박종철의 머리를 욕조에 집어넣는 부분에서 직접 자세를 취했다.
“일부 수사관들의 지나친 직무의욕으로 인해 이러한 불상사가 발생한 것은 매우 유감된 일로…, 극소수 좌경 용공분자를 완전히 척결할 때까지 경찰은 주어진 책무를 다하겠다.”
그는 ‘지나친 직무의욕’ 때문에 발생한 일임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말하며 고문경관을 감싸는 모습을 보였다. 경찰은 여론의 확산을 막으려 신속하게 수사를 마쳤다. 1월24일 검찰은 고문경관 두 명을 구속기소했다. 정부는 치안본부장과 김종호 내무부 장관을 해임했다. 김종호는 박종철이 연행되기 전날 치안본부 대공분실을 방문해 수배자 검거를 지시한 책임이었다.
1월19일 밤 9시40분 경찰은 고문경관 피의자 호송작전을 벌였다. 호송버스 안엔 동일한 진회색 방한복에 모자를 쓴 남자 20명이 타고 있었다. 고문경관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언론의 눈을 따돌리려는 조처였다. 경찰은 이에 대해 “범인들이 대공 업무를 맡고 있기 때문에 북한에 얼굴이 알려지면 안 되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1월16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를 필두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민통련 등 종교·사회단체들의 성명서가 줄을 잇고 집회와 시위가 이어졌다. 야당과 재야 등 민주화세력은 85년 11월 김근태 고문 사건을 계기로 만든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위원회’(고문공대위)를 통해 1월20일부터 26일까지를 ‘박종철군 추모기간’으로 정했다.
박종철 대신 서울대 언어학과 임시 과 학생회장을 맡은 신상민은 과 사무실에 빈소를 마련했다. 그는 박종철이 연행되기 전날 밤늦게까지 함께 술을 마시며 과 학생회 운영에 대한 고민을 나눈 친구다. 빈소가 마련되자 유가협에서 방문했다. 1월18일엔 정부의 여당 인사가 조화를 보냈다. 분노한 학생들은 이것을 끌어내 구석에 처박았다.
1월20일 낮 1시40분 관악캠퍼스 학생회관 라운지 2층에서 서울대 총학생회 주관으로 박종철 추모제가 열렸다. 방학인데다 교문 앞에 전경들이 진을 치고 있었지만 1500여명의 학생이 모였다. 학생들은 진상규명과 함께 고문이 이뤄지는 치안본부·안기부·보안사의 해체를 요구했다.
박종철의 과 선배 장지희가 쓴 추도시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를 이현주 학생이 낭독했다. 아래 글은 그날 낭독된 시의 일부다.
“누가 너를 앗아갔는가/ 감히 너를 앗아갔는가/ 감히 누가 너를 죽였는가/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너 철아/ 살아서 보지 못한 것 살아서 얻지 못한 것/ 인간·자유·해방/ 죽어서 꿈꾸며 기다릴 너를 생각하며/ 찢어진 가슴으로 네게 약속한다/ 거짓으로 점철된 이 땅/ 너의 죽음마저 거짓으로 묻히게 할 수는 없다” 시를 읽는 동안 울먹이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조사는 김세진의 어머니 최순정이 읽었다. 학생들은 박종철을 떠나보내며 그가 즐겨 부르던 노래 ‘그날이 오면’과 ‘꽃상여 타고’를 합창했다. “그대 잘가라 꽃상여 타고/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어이어이 큰 눈물을 땅에 뿌리고/ 그대 잘 가라 꽃상여 타고” 추모제를 마치자 민가협의 어머니들이 모여 박종철의 이름을 부르며 오열했다. “철아, 다 잊어버리고 잘 가그래이.” 박종철은 더 이상 박정기만의 아들이 아니었다. 학생들은 영정을 앞세우고 교문으로 진출했다. 교문 앞은 전경들이 여러 겹으로 진을 치고 가로막고 있었다.
그 며칠 전 1월15일 소형 선박 청진호를 타고 탈북한 김만철씨 일가족의 소식이 언론지상에 보도되었다. 이들은 일본 후쿠이현에 도착해 망명을 요청했다. 일가족 11명은 대만을 거쳐 2월8일 남한에 귀순했다.
언론은 김만철 탈북 사건을 연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박종철 고문사 사건은 잊히는 듯했다. 의혹이 집중된 상황에서 탈북 사건이 발생하자 세상엔 이런 말이 유행했다.
“종철이가 종을 치니, 만철이가 그만 쳐라 했다.”
김만철은 귀순 소감에서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서 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남한에서 그의 삶은 여러 차례 사기를 당하는 등 시련의 연속이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국가 남한도 ‘따뜻한 남쪽 나라’가 아니었다.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누가 너를 앗아갔는가/ 감히 너를 앗아갔는가/ 감히 누가 너를 죽였는가/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너 철아/ 살아서 보지 못한 것 살아서 얻지 못한 것/ 인간·자유·해방/ 죽어서 꿈꾸며 기다릴 너를 생각하며/ 찢어진 가슴으로 네게 약속한다/ 거짓으로 점철된 이 땅/ 너의 죽음마저 거짓으로 묻히게 할 수는 없다” 시를 읽는 동안 울먹이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조사는 김세진의 어머니 최순정이 읽었다. 학생들은 박종철을 떠나보내며 그가 즐겨 부르던 노래 ‘그날이 오면’과 ‘꽃상여 타고’를 합창했다. “그대 잘가라 꽃상여 타고/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어이어이 큰 눈물을 땅에 뿌리고/ 그대 잘 가라 꽃상여 타고” 추모제를 마치자 민가협의 어머니들이 모여 박종철의 이름을 부르며 오열했다. “철아, 다 잊어버리고 잘 가그래이.” 박종철은 더 이상 박정기만의 아들이 아니었다. 학생들은 영정을 앞세우고 교문으로 진출했다. 교문 앞은 전경들이 여러 겹으로 진을 치고 가로막고 있었다.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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