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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길을찾아서] 최루탄에 눈물 흘리며 “종철 꿈 이루기 전엔 못울어” / 박정기

등록 2012-02-02 19:44수정 2012-02-02 20:18

1987년 6월26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부산국본)의 공동대표인 노무현 전 대통령(오른쪽 넷째)과 최성묵 중부교회 목사(오른쪽 셋 째)가 고 이태춘 열사 노제를 이끌고 있다. 이 열사는 6월18일 ‘최루탄 추방의 날’ 행사에 참가했다가 좌천동 고가 위에서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추락해 숨졌다.
1987년 6월26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부산국본)의 공동대표인 노무현 전 대통령(오른쪽 넷째)과 최성묵 중부교회 목사(오른쪽 셋 째)가 고 이태춘 열사 노제를 이끌고 있다. 이 열사는 6월18일 ‘최루탄 추방의 날’ 행사에 참가했다가 좌천동 고가 위에서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추락해 숨졌다.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42
1987년 6월18일 박정기와 은숙은 대열을 따라 가톨릭센터와 시내를 오가며 마주치곤 했다. 박정기는 거리에서 우연히 딸을 만날 때마다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북받쳤다. 부산지역에도 계엄설이 나돌았다. 박정기는 군이 출동하면 목숨을 걸고 싸울 다짐을 했다. 그는 주변 시민들이 말릴 만큼 위험을 무릅쓰고 전경들에게 뛰어들어 사람들을 조마조마하게 했다.

‘최루탄 추방의 날’인 이날, 지난 6월9일 쓰러지는 이한열을 부축했던 이종창 학생이 최루탄 파편에 맞아 역시 의식을 잃었다. 그는 이한열의 병상 옆에 눕게 되었다. 부산에서도 최루탄을 피하다 고가도로에서 추락한 이태춘씨가 병원에 실려갔고, 엿새 뒤 28살의 나이로 운명했다.

6월20일, 광주에서 30만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광주를 비롯해 전국에서 4·19 혁명 이후 고등학생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6월23일 국본은 사흘 뒤 ‘국민평화대행진’ 개최를 선언했다.

부산가톨릭센터의 시위대는 22일 해산했다. 명동성당과 달리 이날 해산을 위해 버스에 탄 시위대를 경찰들이 폭행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6월26일, 34개 도시에서 150만명의 시민들이 거리를 메웠다. 정부는 전국적으로 10만여명의 경찰을 동원해 시위를 막았다. 박정기는 이날 서울에 올라와 남대문 일대에서 시위를 하고 밤차로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는 전과 다른 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서울역에 막 도착해 남대문 쪽에서 밀려내려오는 사람들의 거대한 물결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시민들은 “박종철을 살려내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박정기는 이날을 회고하는 글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처음으로 가슴 저미는 감동 같은 것을 느꼈다. 어디서 그 많은 사람들이 밀려나오는 것인지. 저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민주주의 하자고 모이는 것이고, 거기에 종철이가 많은 기여를 했다는 생각에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그때처럼 세상 사람들이 고마웠던 때도 없었다. 내 자식의 죽음을 헛되이하지 않으려는 그들의 노력. 다행히 최루탄이 가득 눈에 들어가 눈물이 났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얼마나 장한 모습인가?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저렇게 힘찬 모습의 인간을 본 적이 없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그는 결심했다. 앞으로 아들이 꿈꾸던 세상을 만들기 전까지 결코 울지 않겠다고. 앞으로 유가족으로 겪어야 할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리라고 다짐했다. 이때까지 그는 눈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6월항쟁은 거대한 들불로 번졌다. 국내뿐 아니라 일본·미국·독일·캐나다 등 국외에서도 박종철군 추도집회, 한국대사관 항의집회, 백악관 앞 집회 등이 개최되었다. 항쟁기간 동안 박종철의 이름은 세계 각지에서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아로새겨졌다.

항쟁기간 동안 끊임없이 계엄설이 떠돌았지만 전 계층을 망라한 시민들의 거센 저항은 마침내 ‘6·29 선언’을 이끌어냈다.

6월29일, 민정당 대표 노태우는 대통령 전두환에게 직선제 개헌을 수용할 것과 양심수 석방, 언론자유 보장 등 6가지 제안을 하고, 7월1일 전두환은 제안을 수용했다. 이 선언으로 노태우는 광주의 학살자에서 직선제를 이끌어낸 정치지도자로 변신했다. 미리 준비된 각본에 따른 것이었다.

정치권에서 일제히 6·29 선언을 환영하면서 항쟁의 열기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1월14일 박종철의 고문사에서 싹을 틔운 6월항쟁은 7월2일 이한열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6월30일은 박정기가 정년퇴임하는 날이었다. 부산시 수도국의 공무원 생활을 마감한 것이다. 그는 6·29 선언 때도, 정년퇴임식 때도 막내와 함께였으면 생애 가장 기쁜 날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7월9일, 박정기는 서울로 올라와 연세대에서 열린 이한열의 장례식에 참여했다. 10만명의 시민·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추도사를 맡은 문익환 목사가 민주화의 길에서 사라진 열사들의 이름을 한 명씩 소리쳐 불렀다.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전태일 열사여! 김상진 열사여! 김세진 열사여! 이재호 열사여! 박영진 열사여! … 박종철 열사여!”

박정기는 아들의 이름이 호명될 때 설움이 북받쳤다.

“그 외침은 역사의 소리요, 민족의 소리였어. 왜 하필 그 이름들 가운데 종철이가 있어야 했는지…. 철이 이름 뒤에 왜 열사란 말이 붙게 된 건지…. 막내 이름이 메아리가 되어 오랫동안 들려오는데 가슴이 뜨거웠지. 6월항쟁은 내 인생을 변화시켰고, 유가협으로 가는 징검다리였어. 내 삶이 다시 시작되었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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