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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길을찾아서] ‘분노의 공동체’ 의문사유가협의 135일 장기농성 / 박정기

등록 2012-02-22 20:37수정 2012-04-18 16:34

1988년 10월17일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유가협의 지회로 의문사유가족협의회를 결성한 유가족들은 그날부터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무기한 장기농성에 돌입했다. 앞줄 맨 오른쪽이 유가협 회장인 이소선 어머니다.
1988년 10월17일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유가협의 지회로 의문사유가족협의회를 결성한 유가족들은 그날부터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무기한 장기농성에 돌입했다. 앞줄 맨 오른쪽이 유가협 회장인 이소선 어머니다.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56
1988년 8월 창립 2돌 총회에서 유가협 회원들은 의문사 진상규명 운동을 새로운 과제로 결의했다. 유가족들은 그동안 거리와 집회 현장에서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발언과 구호를 외쳐왔지만 해결을 위한 직접 행동에 나서기로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10월6일 회원들은 문익환·계훈제 선생을 비롯해 재야 민주단체, 야당 대표 등과 함께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5공화국 이후 군대내의 의문사사건 진상규명 공동대책위원회’ 발족식을 했다. 군 의문사 진상규명 활동은 군대 조직을 민주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이어 10월17일부터 유가협은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회원들은 종로5가의 기독교회관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의문사유가족협의회 발족식을 열었다. 농성 장소를 기독교회관으로 정한 것은 김동완 목사의 제안이었다.

우종원·최우혁·박선영·정연관·김성수·신호수 등 의문의 죽음을 당한 젊은이들의 유가족과 박정기·이소선·배은심·송광영 등이 참석했다. 의문사유가족협의회의 회장은 정연관의 어머니 임분이가 맡았다. 박정기는 임분이가 회장에 선출된 이유 중 하나를 “경찰의 멱살을 잡고 혼쭐을 낼 만큼 몸싸움에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발족식을 마친 유가족들은 그날로 시멘트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첫 밤을 맞이했다. 박정기는 이 농성이 135일에 걸친 장기 농성이 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의문사 유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농성 초기 이틀은 인권위원회의 배려로 기독교회관 지하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그러나 사흘째부터 식사가 제공되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농성장에서 밥을 해먹기로 하고 밥솥과 부탄가스, 쌀, 반찬 등을 마련했다. 유가협 창립 초기부터 자발적으로 일을 도와온 택시 해고노동자 박채영이 물품을 날랐다. 그가 운전하는 중고자동차 포니는 서둘러 이동할 일이 많은 유가족들을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어느날 농성장을 방문한 박래군도 의문사 진상규명 투쟁에 합류했다. 그의 합류는 애초 그의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농성장에서 상주하며 궂은일을 도맡고 있던 박채영과 간사 정미경을 한두번 돕다가 모르는 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이 하는 일은 회원들의 일정을 짜고 시민들에게 나누어줄 유인물과 팻말을 제작하고 집회를 준비하는 등의 실무였다. 박래군은 ‘유인물을 만드는 일이 큰 품이 드는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전동타자기로 한 자 한 자 찍어요. 편집을 몰라서 종이를 잘라내고 오려붙이며 유인물을 만들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어렵게 한 장 한 장 만들었어요.”

정미경과 박래군은 매일 시내에서 열리는 집회를 파악하고 일정을 짰다. 그 시절 서울시내에서는 집회와 노동자·학생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현장을 찾아가 연대하고 의문사에 대한 관심을 호소했다.

박정기는 의문사 유가족들이 마이크를 잡고 발언하는 모습을 보며 놀라곤 했다. 연설문을 미리 준비하는 사람은 자신 외엔 없었다. 그는 발언할 내용을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불안했다.

그런데 유가족들은 누구에게 발언을 맡겨도 신들린 연설이 쏟아졌다. 평소 말주변이 어눌한 회원도 사람들 앞에 서면 전연 딴사람이 되었다. 즉흥적으로 발언을 맡겨도 말이 술술 나왔다. 발언을 들을 때마다 박정기는 눈시울이 붉어지곤 했다. 그것은 가슴에서 올라오는 소리였다. 입을 열면 내면에 켜켜이 쌓인 응어리가 풀려나왔다. 회원들은 분노를 자제하지 않고 쏟아냈다. 그 순간 유가협은 자식 잃은 이들이 모인 ‘상처의 공동체’가 아닌 ‘분노의 공동체’였고, 분노의 힘은 국가의 폭력 앞에서 느낀 좌절과 무기력을 밀어냈다.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쉴 짬이 없었다. 이동중에도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설치를 요구하며 국회와 각 정당을 방문했다. 항의방문 여정은 연일 이어졌다. 농성 소식이 알려지면서 연대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다. 야당과 국회의원, 민주단체, 대학생, 노동조합 등에서 꾸준히 방문했고 후원금과 후원물품이 밀려들어왔다. 각계각층의 관심과 응원으로 외롭지 않은 싸움이었다.

언론을 통해 소식을 접한 의문사 유가족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농성 열흘째 찾아온 허원근의 아버지 허영춘처럼 홀로 외로운 싸움을 벌이던 이들이 합류하면서 유가협엔 의문사 유가족 회원이 갈수록 늘어갔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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