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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길을 찾아서] 추자도까지 온 일본군 피해 12살때 섬 ‘탈출’ / 오재식

등록 2013-01-09 19:25수정 2013-01-10 09:08

1945년 5월 오재식은 추자도를 떠나기 직전 해안 곳곳에 동굴을 뚫어 연합군에 대항하는 자살특공대 기지로 삼았던 일본군의 광기를 체험했다. 사진은 당시 일본군 자살특공대가 연합군 함대에 부딪혀 폭파시키는 공격용으로 썼던 자살보트 ‘신요’의 모습.
1945년 5월 오재식은 추자도를 떠나기 직전 해안 곳곳에 동굴을 뚫어 연합군에 대항하는 자살특공대 기지로 삼았던 일본군의 광기를 체험했다. 사진은 당시 일본군 자살특공대가 연합군 함대에 부딪혀 폭파시키는 공격용으로 썼던 자살보트 ‘신요’의 모습.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4
1945년 5월 오재식이 초등학교도 다 마치지 않은 12살 어린 나이에 추자도를 떠나게 된 것은 부모의 결단에 따른 것이었다. 날로 광기를 더해 가는 일제의 횡포와 전쟁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8·15 광복’이 머잖은 때였으나 당시 오지 섬마을 사람들에게는 언제 끝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이르러 일본군은 수세에 몰리게 되자 제주도를 저항기지로 삼았다. 그리하여 해안가 바위마다 커다란 굴을 파 동굴기지로 활용했다. 동굴기지에는 폭탄을 실은 고속정이 숨겨져 있었다. 연합군 함대가 제주도 앞바다를 통과할 때를 기다려 일본 특공대는 동굴 속에 숨겨둔 고속정을 타고 와 그대로 부딪쳐 배를 폭파시켰다. ‘해상 가미카제’라는 자살특공대 작전이었다.

제주도에서 시작한 이 작전이 효과를 본 모양인지 추자도까지 동굴기지를 만들기 위해 일본군이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어느날부터인가 굴을 파기 위한 기자재와 부속품을 가득 실은 화물선이 신양리 앞바다에 정박해 있었다. 재식이 다니던 신양공립국민학교(현 추자초교 신양분교)는 신양리 앞바다가 훤히 보이는 언덕에 있었기에 그 화물선을 늘 볼 수 있었다.

하루는 교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을 찢을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미군 전투기가 그 화물선에 로켓포를 쏘아댔던 것이다. 재식은 얼른 교실 밖으로 뛰어나와 1학년 교실에 있는 여동생 재섭부터 챙겼다. 학교는 금세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재섭의 손을 잡고 도망치면서 재식은 커다란 화물선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이며 폭파되는 광경을 고스란히 보았다. 몸에 불이 붙은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바다로 뛰어들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괴성을 지르며 뗏목을 껴안고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그 일대 바닷물이 금세 핏빛으로 물들었다.

재식은 무서워 울고 있는 재섭을 달래 가며 집으로 향했다. 마을로 가는 지름길은 왠지 위험할 것 같아 일부러 뒷산으로 빙 둘러서 갔다. 두려움에 떨며 도착한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둘러보니 마을 전체가 텅텅 빈 것처럼 인기척 하나 느낄 수 없었다. 전쟁이 난 줄 알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뒷산으로 숨어 들어갔던 것이었다.

그날 이후 마을에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곧 난리가 날 것이라는 얘기였다. 재식의 부모는 난리가 나면 그야말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지 모르니 막내아들이라도 살리자는 결심을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즈음 평양에서 원산으로 옮겨가 살고 있던 재길에게 연락을 띄웠던 것이다.

돛단배에 노를 저어 가는 길이니, 추자도에서 목포까지 도착하는 데는 열 시간이 훨씬 넘게 걸렸다. 맏형 재완은 그때 그에게 무슨 말을 해주었던가. 재식은 그 긴 시간 동안 함께 배를 탄 맏형에게 들었던 말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일엽편주 뱃전에 부딪치는 높은 파도를 걱정하며 무사히 당도하기만을 염원할 뿐이었다. 이렇게 고향을 떠나온 재식의 과거 한구석에는 섬소년이란 ‘낙인’(스티그마)이 오롯이 새겨지고 있었다.

마침내 목포항에서 맏형과 작별한 재식은 곧장 원산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12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년이었지만 그 먼 길을 홀로 가는 것이 별로 두렵지 않았다. 한 번도 섬 밖으로 나와 보지 않았던 그가 생전 처음 보는 기차를 타고 가는 그 길에 대한 설렘이 그 발걸음을 내딛게 하는 용기의 원동력이었다.

고 오재식 선생
고 오재식 선생
그로부터 30년이 훨씬 지난 1981년, 재식은 아시아기독교교회협의회 국제부 간사로 방문한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뜻밖에 ‘개떡’을 만났다. 교내 매점 같은 작은 가게(쿱)에서 밀을 껍질째 갈아 만든 그 새까만 빵을 그들은 ‘통밀빵’이라 부르며 최고의 영양식이라고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고운 밀가루는 하나도 없이 밀기울로만 만들어 색깔도 변변찮고 질감도 거칠었던 개떡. 그 떡이 영양식으로 칭송받는 현실을 보며 재식은 흘러간 세월을 가늠할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만 먹었던 떡, 그조차도 추자도를 떠나올 때에야 온전히 제 몫으로 넉넉히 먹을 수 있었던 그 떡, 그 슬픔의 떡에 대한 기억과 함께 막내아들이 추자도 최고의 벼슬인 면장이 되길 바라던 어머니의 기대가 바람결 너머 세월이란 이름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이영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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