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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길을 찾아서] 추자도 출신이 ‘38따라지’ 된 사연 / 오재식

등록 2013-01-21 20:05수정 2013-01-21 21:12

1947년 봄 오재식은 뒤따라 월남한 둘째형 재길과 만나 서울 오류동 함석헌 선생의 거처 근처에 정착한 뒤 교회 대신 함 선생의 서울와이엠시에이(YMCA) 주일 강의를 들으며 다양한 사상을 섭렵했다. 사진은 1950년 한국전쟁 이전 찍은 것으로, 오른쪽부터 함 선생, 김흥호 전 이화여대 교목, 유영모 선생, 현동완 당시 와이엠시에이 총무, 방수원씨.  사진 함석헌선생기념사업회 제공
1947년 봄 오재식은 뒤따라 월남한 둘째형 재길과 만나 서울 오류동 함석헌 선생의 거처 근처에 정착한 뒤 교회 대신 함 선생의 서울와이엠시에이(YMCA) 주일 강의를 들으며 다양한 사상을 섭렵했다. 사진은 1950년 한국전쟁 이전 찍은 것으로, 오른쪽부터 함 선생, 김흥호 전 이화여대 교목, 유영모 선생, 현동완 당시 와이엠시에이 총무, 방수원씨. 사진 함석헌선생기념사업회 제공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12
1947년 3월초 개성 피난민 수용소 가는 길에 홀로 도망쳐 서울에 무사히 도착한 재식은 이튿날 둘째형 재길이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 지인은 형의 말대로 며칠 머물 곳을 주선해주었다. 그사이 재길 형네 가족도 무사히 월남해 왔다. 형네는 재식보다 한결 수월하게 내려왔는데 그것은 훗날 고려대 교수가 된 김성식씨 덕분이었다. 그의 집안은 북한에서 상당한 재산가였다. 45년 공산당 집권 이후 그는 지주라는 이유로 수모를 당하고 재산을 빼앗기게 되자 월남을 결심했다. 하지만 남은 재산이나마 처분해서 내려가는 방법은 너무 위험했다. 재산을 한꺼번에 갑자기 처분하면 주목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침 재길이 월남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그는 사례를 충분히 할 테니 자신의 재산을 갖고 내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재길과 그의 가족은 사례비를 두둑히 받은 안내원을 따라 어렵지 않게 육로로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재길처럼 편안하게 월남한 사례는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리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건 아니었지만 혈혈단신 내려온 재식은 재길 형과 서울에서 상봉하자 만감이 스쳤다. 하지만 형에게 월남하며 겪은 일들을 시시콜콜하게 말하지는 않았다. 재길도 어린 동생이 대견한 듯 바라볼 뿐 별말이 없었다.

재길은 서울 오류동에 자리를 잡았다. 서울이라고는 했지만 오류동은 영등포에서도 더 외곽이어서 당시엔 시내에서 먼 시골이었다. 그곳에 정착한 것은 순전히 함석헌 선생 때문이었다. 그해 3월 중순 월남해온 함 선생을 따라 무작정 그 옆에 집을 얻었던 것이다. 재길은 농사를 지어볼 요량으로 여기저기 돈을 빌려 1천평 가까운 땅을 샀다.

함 선생은 월남한 직후에도 매주일 오후 2시 강좌를 열었다. 장소는 종로에 있는 와이엠시에이(YMCA)였다. 그때도 ‘1일1식주의’를 실천하고 있던 선생은 주일마다 아침을 먹은 뒤 오류동에서 종로까지 2시간 거리를 걸어다녔다. 재길은 늘 선생을 따라 걸어다녔다. 재식도 처음 몇번 따라나섰다가 너무 힘들어 그만 포기하고 버스를 타고 다녔다.

재식이 주일에 교회 대신 함 선생의 강좌를 듣기로 한 것은 서울에 와서 나간 한 교회에서 주일에도 돈을 주고 밥을 사먹는 교인들을 보고 난 뒤였다. 재식은 어린 마음에 남쪽의 교인들은 신앙생활이 엉망진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 선생의 강의는 끝나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았다. 2시간이고 3시간이고 그날 하고 싶은 말씀을 다 해야 끝나는 것이었다. 선생은 끊이지 않고 새로운 이야기를 쏟아냈다. 주로 민족사상과 통일사상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고, 노자와 장자, 공자 등 동양사상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했다. 시인이어서 감성적인 부분으로 접근하기도 하고, 열정적으로 강의하면서 사상의 맥을 정확히 짚어 주면 거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다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식은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주일마다 성서 구절을 통째로 외워 두고두고 음미했듯 함 선생의 강의도 물먹는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재길은 서울 정착 채비가 얼추 끝나자 재식의 중학 진학을 서둘렀다. 재식은 당장 경기중학교에 원서를 넣고 입학시험을 쳤는데 다행히 합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희한하게 면접시험에서 그만 떨어진 게 아닌가. 이유를 알고 보니, 재식이 부모도 없고 월남한 ‘38따라지’여서 받아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 오재식 선생
고 오재식 선생
재식이 ‘38따라지’가 된 것은 형 때문이었다. 재길은 입학 절차를 알아보다, 남한 출신인데 북한에서 살다가 월남한 사람은 새로 입학시험을 치러야 하고, 원래 북한에서 태어나 살다가 내려온 사람은 그 나이에 맞게 편입시험을 치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왜 그런 차이를 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재식이 남한 추자도 출신임을 밝히면 새로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고, 북한에서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중학 1년 과정을 다시 밟아야 했다. 재길은 그때 평양에 호적을 두고 있었는데 그 주소는 ‘평양시 상수구리 41번지’였다. 그래서 북한 출신 월남인으로 편입시험을 보게 하고자 재식도 자신의 호적에 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경기중에서는 반대로 고아에다 38따라지라서 편입을 시킬 수 없다는 얘기였다.

재식이 경기중에서 퇴짜를 맡자 재길은 뒤따라 월남해온 김성식 교수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고려대와 같은 학교 법인인 중앙중학교에서 편입시험을 치를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재식의 시험 성적은 물론 우수했고 면접도 무리 없이 통과했다. 하지만 중앙중 2학년으로 편입한 재식은 그날부터 자신이 남한 출신, 추자도 출신이라는 얘기를 해서는 안 되었다. 그렇게 해서 그때부터 재식은 평양 출신이 되고 말았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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