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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길을 찾아서] 평생 헌신한 기독운동, 중학 4학년때 첫발 / 오재식

등록 2013-01-22 20:35

1949년 오재식은 서울 중앙중학교 4학년 때 김형석 선생이 지도한 학생동아리 기독학생회의 총무를 맡으며 김재준·강원용 목사와 인연을 맺고 평생토록 이어진 기독교 조직운동에 첫발을 디뎠다. 사진은 48년 전국의 대학과 중·고교 기생회를 연결해 ‘대한기독학생회전국연합회’(KSCF)를 결성하고 초대 지도총무를 맡은 강원용 목사가 그 무렵 한신대에서 강연하는 모습이다.
1949년 오재식은 서울 중앙중학교 4학년 때 김형석 선생이 지도한 학생동아리 기독학생회의 총무를 맡으며 김재준·강원용 목사와 인연을 맺고 평생토록 이어진 기독교 조직운동에 첫발을 디뎠다. 사진은 48년 전국의 대학과 중·고교 기생회를 연결해 ‘대한기독학생회전국연합회’(KSCF)를 결성하고 초대 지도총무를 맡은 강원용 목사가 그 무렵 한신대에서 강연하는 모습이다.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13
1947년 봄 오재식은 우여곡절 끝에 서울 중앙중학교 2학년으로 편입했다. 이미 학기가 시작됐지만 재식은 워낙 여러 학교를 옮겨 다녔던 경험 덕분에 곧 학교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다. 2학기에는 반에서 성적이 가장 우수했고, 3학년에서는 반장도 맡았다. 이른바 ‘삼팔따라지’에게는 그런 책임을 잘 맡기지 않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예외였던 셈이다.

반장으로 뽑힌 어느날 윤리 담당인 김형석 선생이 재식을 불렀다. 김 선생은 교내 웅변대회에 참가하라고 권했다. 당시는 정치인은 물론이고 지식인들도 연설을 통해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연설은 매스미디어가 많지 않던 당시 군중에게 무언가를 알릴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었다. 그만큼 연설이 중요하다 보니 자연히 학교에서도 웅변대회를 자주 열었다. 연설가로 키워내기 위한 교육과정의 하나였던 셈이다. 교내 대회에서 우승하면 지역과 전국 대회에 나가기도 했다.

웅변 지도교사도 맡고 있던 김 선생은 재식의 원고 제목으로 ‘한 알의 밀알이 썩어 죽으면’을 내주었다. 재식은 그때까지 웅변을 거의 해본 적이 없었지만, 이 제목으로 글을 쓰는 것은 자신이 있었다. 바로 성서의 ‘요한복음 12장 24절’의 구절 아닌가. 산정현교회에서 ‘성서를 읽을 때는 요절만이 아니라 장을 따라야 한다’는 교육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재식이었다. 재식은 어차피 첫 출전이니 잘하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대회에 참가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1등은 바로 그였다. 웅변도 웅변이었지만 성서 구절을 해석한 원고 내용이 또래 학생들에 비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마도 그즈음 주일마다 함석헌 선생의 강연을 열심히 듣고 새긴 덕분에 제법 기독교에 대한 식견이 쌓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역시 기독교인이었던 김 선생은 그때부터 재식을 눈여겨봤다. 영민하고 생각도 건실하고 무엇보다 신앙이 좋은 재식을 그 뒤로도 잘 챙겨주었다. 1920년 평안남도 대동 출신으로 평양에서 숭실중학교를 다녔던 김 선생은 이후 54년부터 연세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60~70년대 젊은이들 사이에 베스트셀러 저자로 명성을 얻었다. 선생이 쓴 <철학입문서>는 스테디셀러였고, 시대적 현실에 좌절하거나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젊은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재식은 근래에도 명절이면 구순이 넘은 김 선생을 찾아뵈며 평생토록 존경했다.

재식은 49년 당시 6년제였던 중학교 4학년에 올라가서도 반장을 맡았다. 그해 김 선생은 교내 학생동아리로 기독학생회를 만들었다. 6학년의 한배호 선배가 회장을 맡고 재식은 총무를 맡았다. 재식이 팔십 평생 몸담게 될 기독운동 조직에 첫발을 내딛는 계기였다. 한배호는 훗날 연세대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딴 뒤 고려대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정년퇴임한 뒤에는 유한재단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때부터 재식은 기독학생회를 통해 김 선생의 인도 아래 동료 학생들과 기독교 사상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를 통해 기독교에 대한 이해와 확신을 정리해 나갈 수 있었다.

재식이 기독학생회 임원이 되자, 다른 학교 기독학생회에서 자꾸 연락이 왔다. 주로 어떤 모임에 참석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경기중학교였다. 경기중에는 ‘성화회’라는 기독학생회 조직이 있었다. 방학 때면 서울에서 평양으로 돌아와 산정현교회에 다녔던 양재연 장로의 맏아들 양우석 선배가 바로 그 성화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고 오재식 선생
고 오재식 선생
널리 보면 기독학생회는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서부터 생겼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활동이 두드러지지 않아 존재가 미미했다. 그러다 광복이 되고 학교도 점차 안정을 되찾게 되자 46~47년 전국적으로 학교마다 기독학생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구·전주·광주·순천·목포·부산·대전 등에서 지역 단위 연합모임이 결성된 데 이어 48년 4월에는 18개 대학과 54개 고교가 참여한 ‘대한기독학생회전국연합회’(KSCF)가 출범했다. 간도 명동촌 출신으로 한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강원용 목사가 초대 지도총무를 맡았다. 그는 이듬해 목사 안수를 받고 김재준 목사의 경동교회에서 실향민들을 위한 목회 활동을 열성적으로 펼쳤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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