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서울 중앙중학교 기독학생회 총무로 활동한 오재식은 안동교회에서 열린 장공 김재준 목사(앞줄 가운데)의 강연을 처음 들은 뒤 매료돼 한국전쟁 직전까지 그가 소개하는 서양 사상과 진보 신학의 세계에 심취했다. 사진은 45년 당시 조선신학교 교장 겸 교수로 재직하던 장공의 모습. 사진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사업회 제공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14
1947년 당시 경기중학교의 성화회는 ‘거룩한 불의 모임’이란 뜻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상당히 유명한 기독학생 동아리였다. 성화회는 자체적으로 행사를 기획하고 유명 인사를 초청할 만큼 활동영역이 넓었다.
성화회는 매달 한 차례 집회를 하고 정기 강연을 열었다. 49년 중앙중학교 기독학생회 초대 총무가 된 재식은 성화회에서 연락을 받고 모임에 가보았다. 마침 같은 종로구에 있었던 경기중은 중앙중과 그리 멀지도 않았기에 자주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성화회에서 광고 요청이 들어왔다. 안국동에 있는 안동교회에서 열리는 강연회를 홍보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강연 제목이 ‘서양의 몰락’이었다.
‘야, 이거 희한하다. 서양이 몰락하다니… 이게 무슨 말이야.’ 재식은 제목에 흥미를 느껴 강연회를 보러 갔다. 그날 강사는 바로 김재준 목사였다. 일찍이 미국 프린스턴대를 거쳐 웨스턴신학교에서 신학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북만주 용정의 은진중학교에서 교목으로 일했던 그는 40년 봄 개원한 조선신학교(한신대의 전신) 교수로 임용받아 서울로 온 뒤 45년 경동교회를 창설해 청년층 목회에 열성을 다하고 있었다.
김 목사는 ‘고등학생인 너희들이 알아야 하는 내용’이라며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책 <서양의 몰락>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패전국인 독일을 비롯해 각국의 지식인들은 유럽 사회의 앞날에 대해 불안과 불투명한 전망에 빠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슈펭글러가 이 두 권짜리 책을 통해 서양 문화의 동시대적 몰락을 주장하자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서양의 몰락’이 유행어가 될 정도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재식은 그때 “김재준이란 사람에게 완전히 꽂혀 버렸다”고 털어놓았다. 형님 재길이 함석헌 선생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것처럼 말이다. 재식은 그날 이후부터 성화회 집회에 빠지지 않고 나가 김 목사의 지도 아래 지식에 대한 갈증을 채워 나갔다. 중앙중학교의 기독학생회에서는 김 목사를 통해, 주일이면 서울와이엠시에이(YMCA) 함석헌 선생을 통해 그의 사상적 기반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함 선생의 동양 사상과 김 목사의 최신 신학을 통한 서양 사상이 그의 내면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보수 신앙과 진보 신앙이 재식의 믿음 안에서 전혀 모순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 두 사상도 서로 충돌하지 않았다.
그렇게 새로운 지식과 신앙의 세계를 탐구하던 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을 맞았다. 하지만 재식은 전쟁 초기 피난 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인민군이 빠른 속도로 남진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진 지 사흘 만에 서울은 함락되고 말았다. 그때에야 재식은 급히 서울 외곽의 농촌마을로 몸을 숨겼지만, 한곳에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이곳저곳 떠돌며 숨어 다녔다. 급기야 7월1일 유엔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이 들렸지만 인민군은 7월20일께 대전까지 내려간 상태였다. 9월 중순 들어 반격에 나선 유엔군이 서울 탈환을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와중에야 재식은 재길 형네 가족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앞서 얘기했듯이, 부산에서 산정현교회 장로인 장기려 박사와 재회한 재길은 그가 개설한 무료 복음진료소의 약방과 원무 관리 책임을 맡은 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정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날마다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곤궁한 피난살이는 피할 수가 없었다. 재식은 아직 어린 조카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먹이려면 자신의 입이라도 줄여야겠다는 마음에 독립하기로 결심했다.
어느날 무작정 부산항 부두로 나간 재식은 미군 물자를 실어오는 대형 화물선에서 물품을 내리는 일거리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남쪽 지역이라지만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맨손으로 하역일을 하다 보니 손등이 쩍쩍 갈라 터졌다. 부두 노동자가 되어 하루 종일 일해봐야 품삯은 구호물품 상자에 들어 있는 통조림 깡통 하나가 다였다. 거의 굶다시피 하는 생활이 계속되니 몸은 점차 말라갔다. 그 시절 재식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일기 대신 메모하던 노트에 이렇게 끄적거려 놓기도 했다. ‘배가 너무 고프다. 보리밥 한 그릇이라도 원 없이 먹어 보았으면….’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 <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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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오재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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