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여름 오재식은 선교사 제임스 레이니와 함께 미국 코네티컷의 예일대 신학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나 석사학위를 받았다. 2년간 장학금을 받았지만 생활비는 기숙사(사진)에서 지내며 도서관 아르바이트 등으로 벌어야 했다.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35
1964년 여름 오재식은 제임스 레이니의 유학 제안에 한참을 고심했다.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이름난 동부 아이비리그의 명문대를 들어가려면 무엇보다 학부 성적이 좋아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재식은 대학 시절 기독학생회 운동에 몰두한데다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없었던 또다른 속사정이 있었다.
결국 재식은 레이니에게 솔직하게 고백하기로 했다. 서울대 종교학과 시절 담당 교수는 신사훈 교수였다. 그는 굉장히 보수적이어서 학생운동 한다며 돌아다니는 재식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어느 날 B학점 이상만 받으면 과를 옮길 수 있는 학칙을 알게 된 재식은 사회학과로 전과 신청을 했다. 그때 마침 신 교수는 국외 출장 중이었다. 뒤늦게 출장에서 돌아와 과사무실 게시판에 붙은 재식의 사회학과 전과 통보를 본 신 교수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는 사회학과 주임교수에게 자신이 서명을 하지 않으면 전과할 수 없다고 통보하고 재식의 전과를 취소해버렸다. 그렇게 신 교수의 눈밖에 난 까닭인지 재식은 내내 좋은 성적을 받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털어놓자 레이니는 걱정하지 말라며 재식을 다독거렸다. 자신이 추천서를 써주면 입학허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서울대의 C학점은 예일대의 B나 마찬가지 수준이며 나와 4년 동안을 같이 일한 경험에 비춰 매우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추천서를 써서 예일대로 보냈다. 그 덕분인지 예일대에서 그리 오래지 않아 입학 허가서가 날아왔다. 레이니의 추천으로 1년짜리 에큐메니컬 장학금도 받게 됐다.
이렇게 해서 재식은 64년 9월 가을학기에 맞춰 레이니와 나란히 예일대로 유학을 갔다. 재식은 신학대학원 석사 과정에 들어갔다. 박사 과정인 레이니는 학교 밖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고, 혼자 떠나온 재식은 기숙사에서 지냈다. 하지만 둘은 자주 밖에서 만나 서로의 안부와 공부를 챙기곤 했다. 재식은 현지인에 비하면 서툰 영어였지만 열심히 공부해 ‘비플러스’(B+) 이상의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그래서 2년째에는 학교에서 주는 성적장학금을 받아 무사히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재식은 원래 가족과 함께 유학을 갈 계획이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내는 그때 둘째를 임신하고 있었다. 낯설고 머나먼 이국땅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기는 어렵다는 판단에 아내 옥신은 동행을 포기했다. 그 뒤 2년 동안 옥신은 교사 생활을 계속하며 연년생 두 딸을 홀로 키워야 했다.
재식은 레이니의 예일대 신학대학 동기들과도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일본의 다케나카 교수와 미국의 조지 토드 목사가 그들이다. 조지 토드와는 재식이 한국기독학생운동협의회(KSCC)에서 일할 때 알게 된 사이였다. 그때 토드는 대만에서 선교사 사역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레이니를 보기 위해 잠시 서울에 들렀다. 레이니는 재식한테 토드에게 서울을 안내해주라고 부탁했다. 토드는 재식을 만나자마자 자신이 가고 싶은 장소와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알려주며 주선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주로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했다. 재식은 여러 인맥을 동원한 끝에 마침 한국노총에서 총회를 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그를 데리고 총회장으로 달려갔다.
재식의 통역을 통해 노총의 총회를 참관한 토드는 이번에는 서울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로 가자고 요청했다. 가난한 동네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기에 잠시 고심한 재식은 토드를 청계천변으로 데리고 갔다. 서울 도심을 가르는 청계천은 여름마다 큰비만 오면 범람해 인근 민가에 침수 피해를 입히던 시절이었다. 60년 봄부터 복개공사가 시작되어 물길 위로 간선도로가 만들어졌
지만 여전히 그 주변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토드는 빈민촌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살펴보고 돌아갔다.
그 뒤로 별 연락이 없던 토드는 66년 봄 마지막 학기가 끝날 무렵 불쑥 예일대로 재식을 찾아왔다. 학교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재식은 지하실의 책장에서 뽑혀진 책들을 다시 제자리에 꽂느라 정신없이 일하고 있던 중이었다. 토드는 재식의 행방을 물어물어 찾아왔는지 그를 보자마자 한걸음에 다가오더니 “너, 나 기억해?” 하고 물었다. 물론이었다. 재식은 갑자기 나타난 토드를 반갑게 맞았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 <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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