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여름 오재식은 로스앤젤레스에서 당대 미국의 탁월한 사회운동가이자 진보의 우상인 사울 알린스키가 진행한 세미나에서 조직활동 연수를 받았다.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38
1966년 예일대 졸업을 앞두고 오재식에게 조지 토드가 짜준 3개월짜리 프로그램의 마지막 일정은 2주간의 세미나 참가였다. 세미나는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한 연수원에서 열렸다. 그곳에는 미국 전역에서 활동하는 현장 운동가 40여명이 모여 있었다. 주로 주민 조직가이거나 도시농촌선교(URM)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재식과 아프리카 사람 한명을 빼곤 모두 미국인이었다.
그 세미나를 지도한 사람이 바로 사울 알린스키였다. 알린스키는 그때 이미 유명한 민권운동가였고 오늘날 클린턴 전 대통령 부부와 오바마 대통령도 스승으로 따르는 진보의 아이콘 같은 인물이다. 하지만 당시 재식은 그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그와의 인연을 계기로 자신도 조직가의 일생을 살게 될 줄은 물론 알지 못했다.
세미나는 합숙을 하면서 진행되었다. 오후 2시에 시작해서 아침과 오전엔 비교적 여유로웠다. 하지만 늘 밤늦게 끝나서 뒤풀이로 맥주 한잔 함께 할 짬도 없었다. 이튿날 느지막이 일어나 곧바로 씻고 점심을 먹은 뒤 또다시 세미나에 참석하는 일정이어서 꼼짝없이 연수원에 묶여 있는 셈이었다. 어떤 날은 공식 세미나를 끝낸 뒤에도 토론이 이어졌다. 그처럼 빡빡하고 알차게 운영된 까닭에 연수 기간은 2주였지만 시간으로 따지면 한 학기 동안 한 셈이었다.
알린스키의 강의는 파격적이었다. 그는 강의 첫날부터 연수생들에게 존댓말을 전혀 쓰지 않았다. 1909년생인 그는 당시 중년의 운동가이긴 했지만 누구에게나 반말을 하고 때로는 욕마저 섞어 했다. 재식이 평양에서 공부할 때 듣던, 우리말로 치면 “이 종간나 새끼들아!” 식으로 포문을 연 것이다. 재식도 처음엔 듣기 거북했지만, 자꾸 듣다 보니 친근하게 들리고, 형님 같은 편안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알린스키의 어투는 늘 공격적이고 선동적이었다. “당신들 여기 뭐하러 왔어? 이 새끼들, 너희들 죽을 때 침대에 편안히 누워서 죽을 생각 하지 마. 침대에서 죽을 생각 하는 사람 있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나가. 여기 있을 필요도 없어.”
그는 항상 현장의 구체적인 상황을 예로 들었다. “내가 어디서 이런저런 일을 했는데, 결과는 이 꼴이 되었다. 이거 어떻게 생각해? 이럴 땐 뭘 어떻게 하면 좋겠어? 너 말해봐” 하며 불쑥불쑥 지적을 하기도 해서 다들 바짝 긴장한 상태로 강의에 집중해야 했다. 그냥 얘기를 듣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했다.
알린스키는 조직운동의 대가답게 실제 사례를 들어가며 어떻게 사람들이 움직이도록 선동하고, 어떻게 그들의 힘을 발휘하게 만드는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었다. 그런 다음 선동에 따라 일어선 사람들이 뭉쳐 조직을 이루고 스스로 일어나게 됐을 때 조직가는 빠지고 그들이 중심이 되어 일을 진행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누차 강조했다.
그는 그렇게 사람들이 일어나게 된 뒤에는 오히려 조직가들은 그들에게 묶이게 될 가능성이 많은데, 그럴 때는 더이상 자신에게 요구하지 말라고 선언하고 그 뒤로는 그들이 모든 일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렇게 한 마을이나 지역에 주민 조직이 탄생하면 조직가는 2년 혹은 3년 안에 철수하는 게 기본 원칙이라고 했다. 조직가는 영웅이 아니라 힘을 불어넣어주고 떠나는 조력자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재식은 그때 알린스키에게 들었던 조직가의 기본 원칙을 두고두고 기억했다. 그중에서도 일본의 전통극 가부키를 예로 든 이야기는 특히 잊히지 않았다. “남자 배우가 여장을 하고 춤을 추는데 그때 입은 옷이 어른의 팔 하나쯤 더 들어갈 정도로 크다. 그렇지만 그 배우는 기가 막히게 유연하게 춤을 춘다. 사실 그 춤을 추게 하는 것은 그 뒤에 있는 세 명의 보조배우이다. 무대 조명이 여장 배우만 환히 비추고 보조배우들은 그 그늘 속에 있기 때문에 관객들은 눈치조차 채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막이 내리면 관객들은 여장 배우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 그러나 성공적인 공연을 하려면 1시간 무대를 위해 보조배우들은 12시간 이상을 준비하고 춤을 춰야 한다. 그들처럼 조직가도 박수 받고 조명 받을 생각을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기대나 욕망이 있다면 이미 조직가라 할 수 없다.”
이때 재식이 들었던 강의 내용은, 알린스키가 돌연사하기 1년 전인 71년 펴낸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책은 오늘날 진보나 보수 모두에게 ‘조직과 선동의 교과서’로 널리 익히고 있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 <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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