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여름 오재식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사울 알린스키의 강의를 들으며 그의 인간적 매력과 조직이론에 빠져들었다. 사진은 ‘탁월한 선동가’였던 알린스키가 말년인 1960년대 후반 대중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39
1966년 여름 오재식이 참가한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조직활동가 연수에서 사울 알린스키는 자신의 성장기도 들려줬다.
알린스키는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아주 가난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반항심이 컸다. 예를 들면 잔디밭에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가도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란 푯말이 보이면 일부러 들어가 마구 휘젓고 다니는 식이었다.
재식은 그의 얘기를 들으며 자신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추자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정말 가난했던 형편과, 동네 부잣집에서 형님이 매 맞는 모습을 본 뒤 반항심이 생겼던 것이 그랬다. 중학교 때 체육 선생님이 부당하게 단체기합을 줬을 때 모두들 체벌이 두려워 시키는 대로 했지만 반장인 재식은 혼자서 구령에 맞추지 않는 방식으로 불만을 표출했던 일화도 떠올랐다.
알린스키의 인간적인 매력에 더해 그의 철저한 조직가로서의 태도와 그 풍부한 주민 조직 사례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재식은 그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알린스키는 청소년기에도 문제아로 ‘악명’이 높아 시카고 시내 12개 고등학교를 옮겨다녔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시카고대학에 무난히 입학할 수는 있었다. 고고인류학을 전공하면서 수많은 인류가 잔혹하게 죽어간 사실들을 알고는 부전공으로 사회학을 택했다. 가난과 굶주림, 빈민가의 문제, 절망가 소외 등 사회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예수라면 어떻게 대처했을지를 고민하게 됐다. 그 결과, 예수가 사회의 약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때그때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제가 있는 지역에서, 문제가 있는 사람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그는 대학 4학년 때는 일리노이주의 광원 파업에 동참했다가 처음으로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이때 미국 탄광노동운동의 유명한 지도자인 존 루이스를 만나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존 루이스> 전기도 펴낸 알린스키는 자신의 조직 이론과 전략이 많은 부분 존 루이스에게 배운 것이라고 밝혔다.
알린스키는 범죄학 연구 장학금을 받고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그때 시카고의 유명 갱단인 알 카포네 세력과 친하게 지내며 조직범죄의 근본 원인과 더불어 그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파악하기도 했다.
대학원 졸업 뒤 시카고대학에서 강사가 된 알린스키는 본격적으로 흑인 주민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학 당국에서는 학교 확장을 위해 주변 공유지를 사들이면서 용역을 내세워 그곳에 살고 있던 흑인들을 내쫓기 시작했다. 총장에게 찾아가서 항의해도 소용이 없자 화가 난 알린스키는 강사 자리를 그만두고는 주변의 흑인들과 함께 조직을 꾸려 맞서기로 했다.
재식의 기억에 남는 알린스키의 현장 조직 일화는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흑인 밀집지역에 백인이 경영하는 은행이 있었는데 정작 흑인에게는 대출을 안 해줬다. 반면 대출을 받은 백인들은 흑인 지역에도 많은 가게를 열었고, 점차 흑인들은 그 가게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흑인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알린스키는 그들을 조직해 집단대응을 하게 했다.
‘먼저 100명의 흑인을 모아 1달러씩 준 다음 해당 은행에 가서 계좌를 만들도록 했다. 몇 시간 뒤 다시 찾아가서는 그 계좌를 취소시키고 돈을 되찾아오라고 주문했다. 그렇게 3번씩 되풀이했더니 은행장은 알린스키를 찾아와 항의했다. 그러자 그는 그 일이 불법이면 고소하라고 되레 화를 냈다. 결국 은행장은 사과를 하고 흑인에게도 대출을 해주기로 했다.’
이런 사례들을 지켜본 진보적 성직자 버나드 셰일 주교는 알린스키에게 백만장자 마셜 필드 3세를 소개해줬다. 이미 알린스키의 활동에 감동하고 있던 필드는 거액의 기부를 제안했다. 하지만 알린스키는 받지 않으려 했다. 그는 기금을 조건으로 활동을 제약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서약했고, 마지못해 돈을 받은 알린스키는 40년 산업지역재단(IAF)을 만들었다. 산업지역재단은 지금도 미국 각 지역에 지부를 두고 주민 조직 훈련을 제공하고 있다. 60년대 이후 알린스키는 중산층 조직화로 관심을 돌린다. 전후 대대적인 경제개발 시대로 들어서면서 제국주의 세력이 다시 부활할 것을 우려한 그는 바닥 조직보다 중산층을 움
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재식은 알린스키의 당시 판단이 50년 뒤 지금 한국 사회의 시민사회조직에도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시민단체들이 국가나 대기업 등 외부 자본을 받기보다는 어렵더라도 서민 회원들이 십시일반 모금을 하게 함으로써 직접 주체로 나서게 해야 도덕성과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알린스키는 72년 63살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이 새끼들, 조직활동가는 침대에서 죽을 생각 하지 마!” 했던 것처럼 그는 길거리에 쓰러진 지 사흘 만에 죽음을 맞았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 <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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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오재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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