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11월23일 기독학생회와 와이엠시에이 대학부가 합쳐진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이 출범함으로써 기독학생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67년 와이엠시에이 대학부 간사를 맡으면서 통합을 추진해온 오재식은 초대 사무총장을 맡았다. 사진은 70년 1월초 총연맹의 첫 시무식 준비 모습.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43
1971년 6월 이후 한국교회도시산업문제협의회의 조승혁 총무와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총연맹)의 안재웅 간사는 날마다 청계천변 철거촌 세입자들을 만나면서 광주 대단지로 옮겨갈 수 있도록 땅을 분양받는 방법을 의논했다. 마침내 세입자들이 중심이 되어 수습대책위원회를 만들고 그들 스스로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종교계와 행정당국, 언론에 자신들의 처지를 호소했다.
학생사회개발단(학사단)은 교회를 중심으로 모금활동을 벌여 가톨릭 서울대교구와 영락교회, 경동교회 등에서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 노력 끝에 철거민 세입자들은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으로 집단 이주할 수 있었다. 너무나 가난해 살아갈 의지조차 없던 사람들이 학사단과 여러 단체의 도움을 받아 안정적인 생활 근거지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빈민투쟁을 계속하는 동안 지역 주민의 의식도 향상되었음은 물론이다.
안 간사는 학사단 단원들의 학습 훈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미국 선교사 린다 존스에게 세계 인권운동 자료를 교재로 단원들에게 일주일에 한번씩 강의를 해줄 것을 요청했다. 흔쾌히 응낙한 존스 선교사는 필리핀, 남아프리카, 남미, 칠레 등 각 지역의 인권운동 사례를 소개했다. 이 강의 내용을 번역해 <제3세계와 인권운동> 책을 펴냈다. 물론 이 책은 곧바로 금서가 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또 총연맹의 연구간사인 브라이덴슈타인이 연세대에서 강의한 내용을 인쇄해 연구자료로 쓰는 한편 번역해서 <학생과 사회정의>로 펴냈으나 역시 금서가 되었다.
학사단은 처음엔 방학 때 주로 활동을 했지만 점차 할 일이 많아지자 휴학을 하고 전념하는 단원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8명씩 조를 이루어 그중 한두명이 현장에서 살고, 다른 단원들은 주말이나 방과후 시간에 돌아가며 현장으로 찾아와 함께 문제 해결에 나서기도 했다. 71년에는 전국적으로 20~30개 팀이 학사단의 이름으로 활동하던 방식에서 점차 소수정예화해 노동운동에 접근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80년대 학생운동권의 필수과정으로 자리잡은 이른바 위장취업이 이즈음에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68년부터 기독학생운동 단체의 통합작업도 진행됐다. 그해 4월 기독학생회(KSCC)에서는 교수 대표로 이우정·서남동·현영학을 지명하고 학생 대표로는 한기태·장화인·이원규를 정했다. 와이엠시에이(YMCA)도 그해 7월 홍현설·백영흠·안상용·김용옥·신태식을 통합전권위원으로 뽑았다. 통합을 위한 실무자는 오재식·이종경·박형규였다. 이들은 통합조직위원회를 구성해 구체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우선 해마다 여름대회를 와이더블유시에이(YWCA)를 포함해 세 단체가 같이 해왔음에 주목하고, 그해 7월 여름대회를 계기로 통합을 선언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수원의 서울대 농대에서 세 단체가 모여 여름대회를 열었다. 주제는 ‘한국을 새롭게’였다. 이는 그해 세계기독교협의회(WCC) 웁살라총회의 ‘만물을 새롭게’라는 주제에서 따왔다. 800여명이 모인 여름대회는 미래지향적인 기독학생운동을 통해 한국을 새롭게 하는 캠페인을 하자는 것에 합의하며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그렇지만 와이더블유시에이 대학생부는 자체 이사회의 반대로 끝내 함께 통합하지 못했다. 단체의 핵심인 대학생 청년층이 빠져나가면 정체성이 흔들린다는 이유였다. 와이엠시에이도 같은 이유로 이사들이 반대했지만 대학부 지도교수들이 통합을 지지해주었고, 이를 위해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한 덕분에 무난히 통합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한국기독학생회와 와이엠시에이 대학부의 통합 작업은 급물살을 탔다. 그러는 동안 69년에는 학사단 3개 지역(부산·전주·서울)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69년 11월23일 기독학생운동사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 종로2가 와이엠시에이 강당에서 한국기독학생회와 와이엠시에이 대학부의 통합대회가 열려 두 단체가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으로 출발했다. 총연맹은 70년 1월 첫 이사회를 열고 이사장에 박대선, 부이사장에 정희경을 선출하고, 초대 사무총장으로 재식을 선임했다. 학사단은 이직형·전용환, 출판부는 안재웅, 대학부는 김경재, 고등부는 김정일 등 사무국 간사도 배치되었다. 2월에는 독일의 브라이덴슈타인 박사가 연구간사로 부임했다.
이렇게 출발한 총연맹은 한국 교회의 보수적인 터전 위에서 사회참여의 진보적인 신앙을 재생산하는 구심체로 성장해갔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 <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한겨레 인기기사>
■ 북 “불바다” 위협에…남 “지휘세력도 응징” 맞불
■ 금 따러 가세~ 금 잡으러 가세~
■ 1천억 들인 홍상어 실패에…누리꾼 “차라리 인간어뢰를”
■ 타이중의 굴욕, WBC 병역혜택 있었다면…
■ “4대 중증질환 100% 보장은 선거 캠페인용”
고 오재식 선생
■ 북 “불바다” 위협에…남 “지휘세력도 응징” 맞불
■ 금 따러 가세~ 금 잡으러 가세~
■ 1천억 들인 홍상어 실패에…누리꾼 “차라리 인간어뢰를”
■ 타이중의 굴욕, WBC 병역혜택 있었다면…
■ “4대 중증질환 100% 보장은 선거 캠페인용”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