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도시빈민연구소 부소장으로 미국에서 파견된 허버트 화이트는 박형규 목사와 함께 주민조직 활동가를 훈련시켜 1970~71년 청계천 복개공사와 삼일고가도로 건설 등으로 삶터를 잃게 된 판자촌 세입자들의 이주운동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었다. 사진은 70년 4월 경찰이 투석전으로 맞서는 주민들을 제압하고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 일대 천변 판자촌을 철거하는 모습.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45
1969년 초부터 연세대 도시문제연구소 부소장 겸 상임총무로 부임한 미국의 주민조직 활동가 허버트 화이트는 오자마자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 무렵 서울 종로5가에 있는 정신여고 뒤 건물에 외국 선교사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지금의 교회백주년기념관 자리가 바로 선교사들의 기숙사였다. 화이트 부부도 그곳에서 살게 되었는데, 오자마자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일들을 자주 목격했다. 선교사와 그 가족들은 왕처럼 가만히 앉아서 시중을 받고, 한국 피고용인들이 마치 하인처럼 밥이며 청소며 운전까지 다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선교사가 외출할라치면 어느새 그들이 와서 신발까지 깨끗이 닦아놓곤 했다.
한국 도착 일주일 만에 화이트는 분노한 나머지 곧바로 ‘작업’에 나섰다. 그는 우선 영어를 할 줄 아는 한국 피고용인을 찾아 “얼마 받고 여기서 일하냐? 퇴직금은 있냐? 자리는 보장이 되느냐?” 등등 근무조건을 물어보았다. 처음에는 ‘선교사가 별걸 다 물어본다’는 표정으로 의아해하던 그 피고용인도 화이트가 여러 차례 진심을 다해 물어오니 대답을 해줬다. “퇴직금 그게 뭐냐? 우린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화이트는 기숙사를 돌아다니며 한국인들에게 계속 질문을 했다. 어느 정도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듯하자 그는 그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에게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방법까지 알려주었다. ‘혼자서는 안 된다, 여럿이 힘을 합쳐 항의해라. 퇴직금을 보장하고, 고용안정을 보장하라고 요구해라’ 등등. 처음엔 자연스럽게 불만을 털어놓던 한국인들은 화이트가 구체적인 항의 방법까지 알려주자 오히려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화이트는 자신은 미국 사람이고 선교사이니 뒷감당을 해줄 수 있다고 그들을 다독거렸다.
마침내 선교사 기숙사에서 일하는 모든 한국인들이 한목소리로 권리를 주장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선교사들로선 고분고분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당신들이 할 일은 당신이 해라’ ‘안정된 직장이 될 수 있도록 보장해라’ 하며 집단반발을 하니 당황스러운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한바탕 온 기숙사가 들썩인 끝에 최근 갓 들어온 화이트가 이들을 선동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분란의 원흉’으로 그를 지목하고 압박하기 시작했다. 결국 화이트는 그곳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났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이제껏 부당한 대접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한국인들의 단합된 힘을 겪어본 선교사들도 예전처럼 함부로 그들을 부려먹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 소동을 겪으며 한국에 어느 정도 적응한 화이트는 곧 도시빈민 선교사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먼저 그는 연수위원회 위원장인 박형규 목사 및 위원들과 의논해 신학교 졸업생을 비롯한 젊은 평신도 8명을 뽑았다. 그는 그들을 6개월 동안 훈련시켰다. 그들을 청계천변 빈민촌으로 데려가 주민들과 똑같이 먹고 자고 일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빈민지역의 실태를 조사하고 주민을 조직하는 작업에 참여하도록 했다. 지역민들을 만날 때는 수첩이나 노트를 지니지 말고 되도록 허름한 차림을 하도록 세심하게 지도했다. 이렇게 훈련된 활동가들은 빈민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볼 수 있었고, 그들의 생활이 나아질 수 있도록 도왔다. 실의에 빠진 사람에게는 필요한 도움을 주었고, 부당한 처사에 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연대의 힘으로 희망을 갖도록 도왔다. 무엇보다 혼자 싸우는 것은 힘드니 비슷한 처지의 주민들끼리 힘을 합쳐야 된다며 주민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해나갔다.
화이트는 활동가들이 지역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구체적인 사례를 듣고 돌아오면 한꺼번에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이들은 2주에 한번씩 보고서를 작성해 발표했다. 그러면 화이트는 어떤 점은 잘못되었고, 어떤 점은 잘 처리했다는 식으로 평가를 해주었다.
이들의 활약으로 추운 겨울철에 철거당할 위기에 놓였던 청계천변 주민들은 조직을 만들어 서울시청 앞에서 시위를 함으로써 그 시기를 봄으로 늦출 수 있었고, 나중에는 서민아파트 입주권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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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오재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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