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4월8일 일어난 서울 마포구 창전동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를 계기로 도시문제연구소는 주요 서민거주지역 아파트촌으로 활동가들을 파견해 주민조직화를 통한 주거권 확보 운동을 펼쳤다. 사진은 준공 3개월 만에 5층짜리 15개동 가운데 1개동이 형체도 없이 무너져 내린 와우아파트 사고 현장 모습.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46
1960년 후반부터 서울은 정부의 저곡가 정책으로 인해 고향인 농촌을 떠난 이들이 몰려들어 폭발적으로 인구가 늘어나고 있었다. 당장 시급한 문제는 이들이 거주할 주택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이에 서울시는 69년부터 71년까지 3년간 시민아파트 2000개동을 공급해 9만가구가 입주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기한을 맞추기 위해 날림과 부실공사로 지어진 아파트가 얼마나 위험하고 무모한 비극으로 이어지는지는 70년 4월8일 일어난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확인됐다. 서울시가 마포구 창전동에 세운 와우아파트 5층짜리 15개동 가운데 한 동이 그만 푹석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아파트 주민 33명이 사망했고, 38명이 다쳤다. 준공한 지 석달 만에 일어난 사고였다. 아파트가 무너지면서 가파른 경사 아래 있던 판잣집까지 덮치는 바람에, 잠자고 있던 주민 1명도 죽고 2명은 다쳤다.
연세대 도시문제연구소의 연수위원회는 70년 1월부터 3차례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이런 부실 서민아파트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권호경·전용환·이영일은 서대문의 금화아파트로, 이직형·김혜경은 창신동의 낙산아파트로 들어갔다. 또 신상길·이화춘은 연희동의 시민아파트에서 살며 주민조직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와우아파트 붕괴사고가 일어나자 이들은 그해 4월29일 시민·금화 아파트 주민들을 중심으로 서울시민아파트 자치운영연합회를 결성했다. 연합회는 서울시가 이들 지역 아파트 융자금을 일시불 상환제로 일방적으로 변경한 데 항의해 71년 6월 입주자 3000여명을 모아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여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 시위는 그동안 폭압적인 박정희 군사정권 아래서 억눌려왔던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단결력을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도시빈민 선교를 위해 조직한 지역주민 조직체는 교회의 선교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각 지역 주민들이 호소하는 문제들은 교회에서 떠안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훈련된 조직활동가들이 현장 속으로 뛰어들면서 필요한 대안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주민조직을 이뤄낸 다음에는 주민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게 하고 주체적으로 운동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사울 알린스키의 지역조직(CO) 방법론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결론이었다. 또 한가지 기본전제는, 이들 주민조직을 교회가 선교 목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연수위원회에서는 71년 ‘수도권 도시선교위원회’로 이름을 바꾸고 7군데 지역으로 활동의 외연을 넓혀나갔다. 박형규 목사를 중심으로 화이트의 지역주민 조직 운동을 훈련받은 활동가 15명이 서로 연대하면서 점차 빈민·농촌·노동자운동으로 퍼져나가게 된 것이다. 이 기구는 수도권 특수지역 선교위원회, 한국특수지역 선교위원회로 이름을 바꾸며 79년까지 계속된다. 또 도시산업선교회로 맥이 이어져 민주화운동의 한 구심체가 되기도 했다. 주민조직 훈련의 한 갈래는 96년 설립된 한국주민운동정보교육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때 도시문제연구소의 주민조직 활동가 훈련에 필요한 비용은 모두 미국 장로교의 조지 토드로부터 나왔다. 일하는 사람들의 생활비와 활동비까지 모두 미국에서 보내오는 후원금으로 충당했다. 화이트는 3기까지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한 뒤 알린스키의 가르침대로 2년 만에 정확하게 한국을 떠났다. 그의 다음 기착지는 필리핀이었다. 그는 당시 동남아시아 지역 최대 규모로 꼽히던 필리핀의 톤도라는 빈민촌에서 또다시 주민조직 활동을 시작했다. 화이트의 2기 훈련생인 권호경 목사도 훗날 톤도 지역으로 따라 들어가 그와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의 지역주민 조직 활동의 경험이 필요하다고 해서 재식의 추천으로 갔던 권 목사는 3개월 동안 힘든 경험을 했다.
화이트는 톤도에 온 지 1년 만에 놀라운 성과를 냈다. 바로 톤도에 교황 바오로 6세를 초청한 것이다.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의 대표적인 빈민촌 주민들에게 희망을 심어달라고 바티칸을 설득한 결과였다. 당시 필리핀의 추기경인 루피노 산체스를 비롯해 주교들도 모두 방문하면서 톤도 지역은 일약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훗날 필리핀 민주항쟁의 구호인 ‘민중의 힘’(피플스 파워)을 만든 것도 이때 화이트가 조직한 주민조직에서 비롯되었다. 화이트는 톤도에서도 원칙대로 2년 만인 72년 말 철수했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 <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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