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4월 오재식은 사무총장으로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차원에서는 처음으로 ‘4·19 혁명 10돌 기념식’을 추진해 성사시켰다. 그해 4월18일 기독교회관 대강당에서 고등부 주관으로 열린 기념행사에서 그는 ‘학생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했다. 사진은 행사 안내문.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48
오재식은 1971년부터 일본 도쿄에 본부를 둔 아시아기독교협의회 도시농촌선교부 간사를 맡기로 예정된 까닭에 70년 하반기 내내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기생총연맹)에서 벌여놓은 일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하지만 틈틈이 학생사회개발단(학사단) 학생단원들을 대상으로 한 지역사회 조직 강연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학사단 활동 덕분에 기생총연맹은 기본적인 기반을 정비할 수 있었고, 점차 적극적인 사회운동의 방향도 세울 수 있었다.
학사단원들은 현장 속으로 들어가 빈민, 노동자, 농민의 삶을 체험하면서 기독교 사회운동의 선배들도 만날 수 있었다. 인천지역 산업선교를 개척한 조지 오글 목사를 비롯해 조지송·조화순·조승혁과 같은 선배들은 이미 60년대 초부터 노동자들의 현장에서 헌신하고 있었다. 학사단원들은 간접적이나마 선배들의 경험을 공유하며 기독학생운동과 산업선교의 교류를 시작했다. 이제 그들에게 삶의 현장은 단지 선교의 대상이 아니라 신학의 주제이자 주체로 떠오르게 되었다.
한편 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69년 9월 대통령 연임을 허용하는 삼선개헌안을 변칙 처리함으로써 군사정권의 장기집권 야욕을 노골화했다. 이미 이런 사태를 우려하고 있던 진보적인 기독교계 인사들은 69년 봄부터 ‘3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범투위)의 결성을 준비해 그해 7월17일 결성식을 열었다. 범투위에는 329명의 발기인이 참여했고, 윤보선·함석헌·박순천·장준하·김대중·김영삼·이희승 등 명망 높은 지도층 인사들이 집행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김재준 목사가 위원장을 맡았다. 김 목사는 제자인 박형규 목사가 주간으로 있던 <기독교사상>에 찾아가 3선개헌과 같은 중대한 반민주 사태가 터졌는데도 기독교계 언론에서 침묵하고 있다고 질타하기도 했다. 이에 박 목사는 그해 8월호에서 ‘3선개헌 문제’ 특집을 싣고, 김 목사 인터뷰도 소개했다.
그즈음 한국 경제는 68년까지 고도성장을 거듭했으나 그해 들어 심각한 불황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차관 지원을 해주던 미국이 68년 달러 위기에 봉착하면서 상환을 압박하는 동시에 신규 차관을 제공하지 않은 것이 일차적 원인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취약한 재무 상태인 기업에 정부가 온갖 특혜를 제공해 외형만 성장하게 만든 것이 더 근본 이유였다. 경제위기가 심각해질수록 사회적으로는 계층간 갈등과 투쟁도 심화되어 갔다.
이런 상황에서 기생총연맹도 시대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학사단 활동의 경험이 기독학생운동의 정치적 역량을 급성장시켜 놓은 덕분이었다. 총연맹에서는 70년 4월19일 ‘4·19 10돌 기념행사’를 열었다. 이는 기독교계 최초의 공식 4·19 추모 행사로, 기독학생운동이 4·19의 자유민주주의 정신을 존중한다는 뜻을 밝힌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해 11월13일 재식은 서울 광화문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현장과 신학계의 역할’ 주제 강좌에서 강사로 초청받았다. 강좌를 주관한 연세대 서남동 교수가 그에게 준 강연 주제는 ‘현장은 무엇인가?’였다. 앞서 60년대 신학자들이 ‘프레젠스’(presence)의 뜻을 토론하던 끝에 생겨난 ‘현존’이란 개념이 70년 들어 ‘현장’으로 바뀌어 갔는데, 선배들과 달리 이미 도시문제의 현장 속에서 활동을 해온 학사단 단원들에게 현장은 더이상 학문적 언어가 아니라 삶과 호흡하는 감동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재식이 강연 차례를 기다리며 원고를 살펴보고 있을 때, 갑자기 한 학생이 뛰어들어와 옆자리에 앉았다.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활동중인 학사단원인 그 학생은 가쁜 숨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사무총장님 큰일 났습니다.” “아니 왜?” “평화시장 앞에서 어느 노동자가 분신자살을 했어요. 지금 명동 성모병원으로 실려갔는데 가망이 없다고 해요.” “뭐라고? 아니 왜 자살을 했다는 거야?” “거기 노동조건이 형편없잖아요. 그래서 이 친구가 늘
그 문제를 지적했는데,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 친구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고 외치면서 분신자살을 시도했다는 거예요.”
재식은 그 순간 당장 평화시장으로 뛰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바로 강연할 차례였기에 애써 마음을 억눌렀다. 그는 비장한 심정으로 연단에 섰다. 그러나 준비한 원고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결국 그는 방금 전해들은 젊은 노동자의 분신 소식을 청중들에게 알렸다. 그의 이름은 전태일이었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고 오재식 선생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