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1월13일 오재식은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산화한 청계피복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사건에 대한 보수 개신교계의 냉담한 반응에 분노해 ‘예수의 죽음’에 비유한 글로 각성을 촉구했다. 사진은 그해 11월18일 서울 창동 창현교회에서 가족장으로 치러진 전태일 열사의 장례식 모습.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48
1970년 11월13일 오재식은 서울 광화문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신학 강연회 연단에 올라 청중을 쭉 둘러봤다. “방금 동대문에서 활동하는 학사단 학생이 제게 와서 보고를 했습니다.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한 노동자가 근로기준법을 지켜달라고 여러 차례 업주에게 호소를 했는데, 끄떡도 안 하니까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이를 주장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지극히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해달라고 국민들에게 온몸으로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현장은 무엇인가’를 얘기하러 왔지만,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 박정희 정권은 3선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킨 뒤 장기집권을 위해 공포정치의 강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때문에 교회에서 열리는 강연회장에도 반정부세력의 동향을 감시한다는 명목 아래 사복경찰이 곳곳에 심어져 있었다. 하지만 재식은 전태일의 분신 소식에 흥분하기도 했고, 이를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감시에 대한 두려움마저 잊고 있었다.
강연이 끝나자마자 재식은 서남동·현영학 교수 그리고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의 연구간사인 독일인 브라이덴슈타인과 함께 명동 성모병원 영안실로 급히 달려갔다. 이들이 전태일 열사의 첫번째 조문객이었다. 전태일은 평화시장 피복공장의 재단사이자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던 22살 젊은이였다. 재식을 비롯한 일행은 그의 어머니 이소선씨를 만나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전태일은 매일 걸어다니며 버스비를 아껴 배고픈 어린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주던 따뜻한 품성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가 일하는 평화시장은 너무나 열악했다. 좁은 공장 안에 만들어놓은 2층 다락방에서 어린 여공들은 하루 종일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일만 해야 했다. 온종일 빛도 한번 못 쬐며 재봉틀을 돌려야 하는 여공들은 나쁜 공기와 환경으로 갖가지 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14시간이 넘게 일하고도 화장실 가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 했다. 피곤한 탓에 깜박 졸다가 재봉틀 바늘에 찍힌 손등이 퉁퉁 부어도 일을 쉴 수 없었던 그 어린 누이들을 보며 전태일은 그들을 돕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다 그는 68년 노동법을 알게 되었고 평화시장 재단사들을 중심으로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모임을 시작했다. 자연히 부당한 일이 있으면 사업주에게 대표로 항의하는 사례도 늘어갔다. 심지어 대통령에게 노동자들의 현실을 알리는 호소문을 쓰기도 했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함께 공부하던 ‘삼동회’ 회원들과 함께 본격적인 평화시장 근로 개선 운동에 나섰지만 노동문제 해결을 위한 사업주의 약속은 번번이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11월13일 그날, 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그리고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고 외치며 불길 속에서 사그라져 갔던 것이다.
조금 있으니 서울대 법대 학생 대표들이 장례식장으로 찾아왔다. 조영래·장기표·최종고가 그들이었다. 재식은 그날 만남을 계기로 이들과 친밀하게 지냈다. 서울대 법대 학생운동과 기독학생운동이 손을 잡게 된 것이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아까운 청년이 목숨까지 바쳐 항의를 해야 하는 노동현실에 대해 교회가 나서야 한다고 중지를 모았다.
재식은 교수들과 의논한 뒤 성모병원에서 가장 가까운 영락교회로 갔다. 담임목사를 설득해 영락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도록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만나주지도 않던 그 목사는 끝내 “자살한 사람의 장례는 교회에서 할 수 없으며,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출석하고 있는 교회에 가서 하는 것이 원칙”이라며 거절했다. 그런데 11월18일 경찰은 일방적으로 전태일의 주검을 옮겨 성북구 창동의 창현교회에서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러버렸다.
허탈해하던 재식은 서울대 법대에서 추모식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다. 하지만 경찰이 벌써 학교를 둘러싸고 출입을 막고 있었다. 기독총연맹의 대표로서 준비해 간 꽃 한송이조차 젊은 영혼에게 바치지 못하게 하는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브라이덴슈타인과 함께 학교 뒷담을 넘어 끝내 추모식에 참석했다. 그 뒤 11월25일 연동교회에서 개신교와 가톨릭이 공
동으로 주최하는 전태일 열사 추모예배가 열렸다. 개신교에서는 도시산업선교회 실무자협의회와 기독총연맹이, 가톨릭에서는 가톨릭노동청년회와 서울대교구연합회가 공동주관했다. 이날 추모예배에는 그야말로 인파가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재식은 전태일의 죽음을 대하는 교회의 태도에 분노가 일었다. 그는 <기독교사상> 12월호에 ‘어떤 예수의 죽음’이란 전태일 추모사를 기고했다. 전태일을 예수로 비유해, 교회가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밝힌 내용이었다. 보수 교계에서는 반발이 거셌지만 호응도 뜨거웠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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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오재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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