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재식은 1971년부터 아시아기독교교회협의회 도시농촌선교회와 가톨릭의 아시아주교회의 인성개발위원회가 주도한 에큐메니컬 주민조직 활동 기구인 악포(ACPO)의 실무를 맡았다. 사진은 악포의 운영기금 조달을 도맡아 해준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의 간사 해리 대니얼로 인도 출신이다.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51
1971년 1월 재식은 아시아기독교교회협의회 도시농촌선교회(CCA URM) 업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특히 다케나카 마사오 아시아협의회 위원장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악포(ACPO·아시안 커미티 포 피플스 오거니제이션)를 조직하고 실무를 도맡아 했다. 다케나카 위원장은 조지 토드와 긴밀한 협의 속에 악포를 추진하고 있었다.
앞서 70년 중반 무렵 가톨릭과 개신교의 에큐메니컬(초교파 교회일치) 운동 인사들이 교토에 모여 아시아의 가난한 민중들을 조직하기 위한 논의를 했다. 그 결과로 71년 2월 악코(ACCO·아시안 커미티 포 커뮤니티 오거니제이션)가 결성됐고, 이를 발전시킨 것이 악포였다. 71년 6월 생겨난 악포는 개신교의 아시아협의회 도농선교회와 가톨릭의 아시아주교회의(FABC) 산하 인성개발위원회(인성회·OHD)가 손을 잡고 만든 조직이었다. 악포는 8인위원회를 구성해 각 나라에서 행해지고 있는 산발적인 개신교와 가톨릭의 프로그램들을 어떻게 해서든 연합시키고 연대하고자 했다. 주민들에게 조직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주민을 훈련시키고 그 훈련 조직을 지원한다는 목표를 정했다.
악포에는 한국의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SMCO)와 크리스천사회행동협의체(KCAO)를 비롯해 일본·홍콩·필리핀·타이·인도 등 아시아 각국의 주민운동 그룹이 참여했다.
그 가운데 필리핀의 주민조직체인 ‘페코’(PECO)의 사례는 악포가 만들어지는 데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수도 마닐라에 있는 톤도는 대표적인 빈민촌으로 68년부터 개신교·가톨릭·구세군 등에서 최소한 30여개 종교단체가 빈민선교 활동을 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각 단체의 실무자를 중심으로 ‘에큐메니컬한 선교를 해야겠다’는 자각이 생겨나 페코를 만들게 되었다. 70년 허버트 화이트의 노력으로 교황 바오로 6세가 톤도를 방문했을 때 톤도 주민조직 위원장인 페레라가 교황과 함께 나란히 서있는 모습이 외신을 타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 덕분에 톤도는 주민조직의 메카로 떠오르게 됐다. 이때의 경험을 통해 개신교와 가톨릭이 손을 잡으면 더 효과적인 조직 활동이 가능하다는 신화가 생겨났다.
가톨릭의 인성회 위원장은 라바얀 주교였고, 간사는 미국인 신부인 데니스 머피였다. 재식은 머피와 호흡을 맞춰 악포의 실무자로 이 조직의 뒷바라지를 했다.
그런데 악포를 만들기 전 한가지 난관이 있었다. 바로 운영비 문제였다. 협의 끝에 아시아 도농선교회와 인성회에서 5만달러씩 운영비를 내기로 하고, 사무실은 필리핀에 두기로 했다. 그렇지만 5만달러의 자금을 마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 다케나카 위원장의 능력이 발휘되었다. 가는 곳마다 악포의 필요성을 열심히 홍보하고 설득해 기금을 모아온 것이다. 사실 아시아협의회도 예산이 부족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기금은 제네바의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보내왔다. 특히 재식의 전임자로 세계협의회 간사인 해리 대니얼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인성회에서는 약속한 기금을 다 마련해내지 못했다. 그래서 우선 도농선교회의 기금으로 주민조직 훈련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물론 이 훈련 프로그램 뒤에는 토드의 지속적인 조언이 있었다.
재식은 악포를 통해 가톨릭 지도자들과도 좋은 인연을 쌓았다. 누구보다 악포에 열정적이었던 라바얀 주교는 리버럴한 호인이었다. 그는 개신교 행사인 아시아협의회 총회에 기꺼이 참석해 악포를 소개할 정도로 열린 사람이었다. 화이트에게 자극을 받은 필리핀의 에드 델라토레 신부와 유싱 코 신부도 악포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이들은 인성회의 머피 신부와도 단짝이었다. 그런데 두 신부는 현장에서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세속에 익숙해진 탓인지 몇년 뒤 모두 사제복을 벗고 결혼을 했다. 주민들을 대변해 싸우다 감옥에 가는 일도 잦았는데, 옥바라지를 해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던 것이다.
악포는 아시아 곳곳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둔 뒤 결성 20년 만인 91년 공식 해산했다. 하지만 악포의 개입으로 각 나라에 생겨난 주민조직 인프라를 통해 그 영향력은 이어져 나갔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고 오재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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