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교육

[길을 찾아서] 마르코스·박정희 계엄령에 주민조직 지하로 / 오재식

등록 2013-03-19 19:33수정 2013-03-20 09:08

1972년 9월 필리핀에 이어 10월 한국에서 잇따라 비상계엄령이 발동되면서 오재식의 도쿄 아시아기독교교회협의회 도시농촌선교회 사무실은 민주화를 위한 시민조직 연대의 구심체가 됐다. 사진은 66년 10월 마닐라에서 열린 베트남 참전 7개국 정상회의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왼쪽)을 마르코스 대통령(오른쪽)이 공항에서 영접하는 모습.
1972년 9월 필리핀에 이어 10월 한국에서 잇따라 비상계엄령이 발동되면서 오재식의 도쿄 아시아기독교교회협의회 도시농촌선교회 사무실은 민주화를 위한 시민조직 연대의 구심체가 됐다. 사진은 66년 10월 마닐라에서 열린 베트남 참전 7개국 정상회의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왼쪽)을 마르코스 대통령(오른쪽)이 공항에서 영접하는 모습.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52
1972년 9월 오재식은 아시아기독교교회협의회 도시농촌선교회 주관으로 필리핀에서 ‘행동신학’ 주제의 워크숍을 열었다. 신학과 현장을 연결하고자 마련한 자리였다. 그래서 첫날 워크숍에 앞서 참석 신학자들은 모두 재식이 지정해준 현장에 가서 하룻밤을 지내고 돌아와 토론을 하기로 했다.

한국 대표 신학자는 현영학(2004년 작고) 이화여대 교수였다. 현 교수에게 지정된 곳은 바닷가 빈민촌이었다. 현장에 도착해 다급히 화장실을 가야 했던 그는 찾을 수가 없어 안내원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화장실이 없다며, 주민들은 다들 해변에 가서 그냥 해결한다며 씩 웃었다. 하는 수 없이 현 교수도 해변 쪽으로 가서 바지춤을 풀어야 했다. 그 순간 갑자기 동네 아이들이 잔뜩 몰려왔다. 아이들은 ‘외국인도 우리랑 똑같네’ 손가락질하며 즐거워했다. 현 교수는 이튿날 워크숍에서 이 얘기를 들려줘 좌중을 웃겼다.

여러 나라에서 온 신학자들 모두 현장에 다녀온 경험을 보고했는데 상당히 생생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다. 워크숍은 내내 아주 재미있고 발랄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만약 학자들이 모여 앉아 토론만 했다면 빈민들의 생활고나 비참한 현장 사례 같은 내용이 주로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직접 빈민들의 일상을 경험해보면서 학자들은 현장 조직 활동이 결코 무거운 사명만은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재식은 워크숍을 성공리에 마친 뒤 곧바로 회의 일정에 따라 뉴질랜드의 오클랜드로 향했다. 그런데 이튿날 일어나 신문을 보니 필리핀에 계엄령이 내려졌다는 기사가 났다. 재식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닐라에서 비행기를 탈 때까지 그런 살벌한 조짐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65년부터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집권한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 정권은 공산 게릴라와 무슬림에 대한 대량학살을 일삼으면서 한편으로는 시민사회운동도 탄압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필리핀은 60년대 후반에 이르러 독재 타도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의 대정부 투쟁이 활발하게 진행중이었다.

재식은 오클랜드의 일정을 모두 접고 다시 필리핀으로 갔다. 주민조직과 도시농촌선교회와 관련한 활동가들의 안위가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곳저곳 둘러보며 수소문을 해봐도 다들 숨었는지 활동가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허탈하고 막막한 심정으로 마닐라 시내 번화가를 걷고 있던 재식은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곧바로 가까이 다가가 보니 ‘피플파워’ 조직원인 시에사 타구바(C. Taguba)였다. 그는 노점상 파라솔 아래에서 태연한 자세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재식은 주위를 둘러보며 나직한 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숨었는데 넌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숨는 것보다 여기가 더 안전해. 숨어봤자 갈 데가 연고지밖에 더 있어? 경찰은 당연히 연고지부터 수색할 거고. 그러면 당연히 잡히게 되어 있어. 그렇지만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이라도 먹고 있으면, 경찰도 설마 수배 떨어진 사람이 배짱 좋게 길거리에 있을까 싶어 그냥 지나치거든.”

참 그럴싸한 말이었다. 재식은 그의 지혜를 칭찬하면서 다른 곳에서 은신중인 친구들을 도울 테니 후원금을 보낼 방법과 연락처를 도쿄사무실로 알려달라고 당부하고 헤어졌다. 그 뒤부터 타구바는 재식에게 은밀하게 연락을 해왔다. 그 덕분에 도시농촌선교회의 예산을 타구바를 통해 수배중인 피플파워 활동가들에게 무사히 지원할 수 있었다. 타구바는 지금 네덜란드에서 살고 있다.

고 오재식 선생
고 오재식 선생
그런데 한달쯤 뒤인 10월17일 한국에서도 비상사태가 벌어졌다. 이른바 ‘10월 유신’의 서막이었다. 이어 독재자 박정희는 12월27일 대통령에 취임해 유신헌법을 공포함으로써 영구집권의 길로 들어갔다.

필리핀에 이어 한국에서마저 비상계엄령이 터지자, 도시농촌선교회의 도쿄사무실은 그야말로 숨가쁘게 움직여야 했다. 한국에서 정권의 감시와 탄압을 받는 수도권선교위원회와 필리핀 정부로부터 수배받고 있는 피플파워 그룹, 톤도 주민조직 그룹이 모두 지하로 숨어야 했다. 그러자 여러 복잡한 일들이 일어났는데, 그 일들을 해결해야 하는 곳이 도쿄사무실이었다. 실무자인 재식은 그야말로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만큼 뛰어다녀야 했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 <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한겨레 인기기사>

B-52, 한반도서 폭격훈련…“목표물 타격 성공”
사회지도층 ‘성접대 의혹’ 별장 가보니…
굿바이 국보센터 서장훈…“너무나도 부족, 늘 죄송했다”
검찰 “정수장학회 ‘회동 3인방’ 증인 소환 않겠다”
여수산단 폭발현장에 계약직 투입 당시 40m 밖 작업자들은 “가스 있다” 철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속보] ‘입시비리’ 조국, 징역 2년 확정…의원직 상실 1.

[속보] ‘입시비리’ 조국, 징역 2년 확정…의원직 상실

검찰, 조국 실형에 “신속하게 형 집행 예정”…내일 출석 통보할 듯 2.

검찰, 조국 실형에 “신속하게 형 집행 예정”…내일 출석 통보할 듯

[단독] 도이치 주범 “주가조작은 권오수·김건희 등 합작품인 듯” 3.

[단독] 도이치 주범 “주가조작은 권오수·김건희 등 합작품인 듯”

[단독] 경찰들 “윤석열 ‘가짜 출근’ 쇼…이미 다 아는 사실” 4.

[단독] 경찰들 “윤석열 ‘가짜 출근’ 쇼…이미 다 아는 사실”

[속보] 최강욱 “조국 아들 인턴했다” 허위 발언…벌금 80만원 확정 5.

[속보] 최강욱 “조국 아들 인턴했다” 허위 발언…벌금 80만원 확정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