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10월 어느날 오재식은 지명관 교수를 만나러 가고 있었다. 덕성여대 교수였던 지명관은 그해 7월부터 도쿄대에 교환교수로 와 있었다. 재식은 가족과 함께 지내고 있었지만 지 교수는 홀로 지내고 있었다. 도쿄대에서 나오는 생활비로 서울의 가족들까지 부양하느라 그는 늘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듯했다. 재식은 그를 자주 집으로 초대해 같이 식사도 하며 술친구로 지내고 있었다.
지 교수는 재식의 서울대 종교학과 선배로 둘의 인연은 꽤 깊었다. 나이는 지 교수가 9살 위였지만 뒤늦게 복학한 까닭에 재식과 수업을 같이 듣곤 했다. 한국전쟁 때 통역장교로 4년간 복무한 그는 육군 중위로 제대한 뒤 전시연합대학 시절 복학하면서 군복을 입고 강의실에 나타나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평북 정주 출신인 지 교수는 원래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사회참여에 눈을 두게 된 것은 바로 재식 때문이었다. 62년 어느날 재식은 덕성여고 교장이던 지 교수를 찾아가 와이엠시에이(YMCA) 다락원에서 강연을 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주제는 ‘세속화에 대한 것’이었다. 지 교수는 당연히 교회가 세속화되는 것은 나쁜 것이니 경건주의적 신앙을 잘 지켜야 한다는 요지로 강연을 했다. 당시 기독학생들 사이에 화제였던 하비 콕스의 <세속도시>를 읽어보지도 않았던 그는 나중에야 자신이 주최쪽의 의도와 달리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재식을 만나 ‘그때 내가 완전히 딴소리를 했는데, 자네가 아무 말도 안 했던 걸 보면 내가 엄청 대선배라서 그랬던 거지?’ 하며 농담처럼 사과를 했고 둘은 그렇게 웃어넘기기도 했다.
지 교수는 4·19 혁명을 겪으며 한국 사회의 현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재식을 만나면서 구체적인 사회참여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다. 또 김관석 목사가 주간으로 있던 <기독교사상> 편집위원을 맡아 편집회의에 참여하면서 점차 인식을 넓혀갔다. 그러다 64년 8월부터 장준하 선생이 창간한 <사상계>의 주간을 맡아 실질적으로 사회참여 운동에 깊이 발을 담그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에 가장 비판적이던 <사상계>는 사장과 편집인이 구속되는 등 탄압을 피할 수 없었고 결국 70년 5월 폐간당했다.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지 교수는 마침 도쿄대에서 교환교수 초빙을 받아 홀연 한국을 떠나왔던 것이다.
일본에 와서 그는 그동안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보기에 일본은 분야별로 필요한 연구자료도 많고, 세계의 여러 선진적인 사상을 활발하게 받아들이는 등 지적 발전을 이뤄 이미 세계적인 수준의 학문 연구 토양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도쿄대에서 그는 남과 북을 아우르는 ‘한국의 사상’에 대해 연구하고 글로 써보겠다고 다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재식을 만나게 되어 자주 어울렸고, 그때마다 사소한 신변 이야기부터 시작해 한국의 정치상황이나 한국 교회의 현실 등과 같은 이야기로 흘러가곤 했다.
둘은 자주 만나게 되면서 정치나 사회 현실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가고 있었다. 특히 지 교수는 ‘사회가 이 모양이니 교회가 정신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이 어려운 상황이니 재식이 자네가 똑똑하게 활동을 잘해야 할 거야. 네가 일본에서 할 일이 많겠다’ 하면서 격려해주곤 했다.
재식으로서도 지 교수에게 도움을 청할 일이 적지 않았다. 재식은 한국의 정치상황이 점차 나빠지고 있으니 국내의 반독재 활동만 기대할 게 아니라 국외에서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당연히 한국과 다른 나라를 연결하는 도쿄가 그 중심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게다가 세계교회협의회에서도 협력할 뜻을 전해와, 도쿄를 중심으로 연합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이 섰다. 그래서 함께 믿고 일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지 교수가 적임자였다. 그런 생각으로 기회를 보고 있었던 재식은 지 교수가 먼저 국내 상황을 염려하는 얘기를 꺼내자 반갑기 그지없었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