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재식은 1974년 호주 출신 딕 우튼 목사(뒷줄 왼쪽)의 도움으로 박정희 정권에서 연장을 거부당한 한국 여권을 재발급받을 수 있었다. 사진은 우튼이 64년부터 5년간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할 때 서울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 사람들과 함께한 모습.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63
1974년이 되자 오재식에게 뜻밖의 문제가 생겼다. 여권 만료 기한이 다가와 신청을 했는데 한국 정부에서 연장을 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아시아교회협의회 도시농촌선교회(CCA-URM) 간사로서 수시로 여러 나라로 출장을 다녀야 하는 그로서는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여권 때문에 체포 위험을 무릅쓰고 국내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불법체류자로 남아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그때 한국 정부는 일회용 단수여권만 발급해주었기 때문에 귀국하면 여권을 회수했고, 다시 외국으로 나가려면 새 여권을 받아야 했다. 그가 돌아가면 쉽게 다시 여권을 내주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재식은 문득 리처드(딕) 프랭크 우튼 목사를 생각해냈다. 64년부터 5년간 선교사로 한국에서 활동한 그는 한국 이름 ‘우택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우튼은 마산을 거쳐 서울의 연세대 어학당에서 우리말을 배운 뒤 산업현장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고자 영등포산업선교회를 직접 찾아갔다. 조지송 목사와 함께 활동하며 그는 병원이나 단체 설립을 돕고 노동자들이나 정치적 양심수들을 돌봐주었다. 그는 한국의 민중신학과 기도생활을 체험하면서 자신의 인생도 바뀌었다고 말하곤 했다. 선교사 임무를 마치고 호주(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간 뒤에도 현지 선교위원회의 인권총무를 맡고 있었다. 또 아시아협의회와 세계교회협의회(WCC) 국제관계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속적으로 한국의 인권과 민주화 운동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의 부인 베티도 간호사 출신으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일하며 한국의 십대 여성들을 치료하고 보호하는 일에 헌신했다. 한국 이름 ‘우애진’으로 불린 그는 가출 소녀들에게 자립의 기회를 제공하는 희망의 집, 매춘여성들에게 재활교육을 시켜주는 은혜의 집, 미군부대 주변 매춘여성들을 보호하는 믿음의 집과 손을 잡고 기꺼이 그들의 상처를 돌봤다.
재식은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활동할 때부터 우튼과 친숙하게 지냈다. 누구보다 한국의 엄혹한 상황을 잘 알고 있고 도쿄에서 재식이 해야 할 역할을 잘 알고 있는 우튼이라면 자신을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호주의 멜버른에 있는 그에게 전화를 했다. “여권을 연장해야 하는데 한국의 군부정권에서 내가 들어오기만 하면 체포한다는 정보를 들었다. 혹시 내가 호주 여권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우튼은 금세 상황을 알아차려 곧바로 캔버라로 날아갔다. 당시 호주는 노동자계급을 대변하는 노동당이 집권하고 있었다. 그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노동당 간부를 만나 재식을 구할 방법을 의논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그는 호주 정부에서 재식에게 영주권을 내주기로 결정했다는 낭보를 전했다. 그는 도쿄에 있는 주일호주대사관에 이미 연락을 해두었다고 덧붙였다.
재식은 호주대사관에 가서 영주권 신청을 허락한다는 메모지만 들고 주일한국대사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메모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자, 봐라. 나는 이제 호주 여권을 받을 수 있다. 당신네들이 내 여권을 연장해주지 않을 모양인데, 이제 내가 호주 시민이 되면 마음대로 한국 민주화 관련 일을 할 수 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당신네들이 결정해라.”
재식은 그 메모지만 거기다 두고 그냥 와버렸다. 그는 물론 호주 시민권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니 만일에 대비해 준비를 해둔 것이었다. 메모지만 남겨두고 온 것은 일의 승부를 건 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1주일 뒤쯤 한국대사관에서 여권이 나왔으니 가져가라는 연락이 왔다. 가서 보니 여권에는 기간이 연장되어 있었다.
재식은 살아오면서 뜻밖의 인연으로 배려와 도움을 받아 결정적인 어려움을 해결한 적이 많았다.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우튼은 물론이고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호주 노동당 간부의 도움 덕분에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린 것이다. 여권 만료 기한이 넘지 않도록, 불과 1주일 만에 국제적 네트워크를 통해 영주권 승인까지 받았으니, 인터넷은커녕 팩스도 없던 그 시절에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재식은 도쿄 시절 내내 그런 기적 같은 일화를 수없이 경험했다. 그는 기독운동과 교회를 통한 인맥이 없었다면 제대로 살 수조차 없었을 것이라고 늘 생각했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 <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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