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총각은 1972년 5월 한국 노동조합 사상 첫 여성 위원장인 주길자 지부장을 탄생시킨 동일방직 노조에서 쟁의부장을 맡았다. 사진은 당시 여성 노조 대표를 추대하고 전원 여성 집행부를 구성하는 데 산파 노릇을 한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 교육을 받는 모습.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16
1972년 5월10일 동일방직노동조합 정기대의원대회에서 한국 노동조합 역사상 최초로 여성인 주길자가 위원장(섬유노조 지부장)에 선출되었다. 후보 다섯명 가운데 단 한명이 여성이었으며, 회사 쪽의 지원을 받은 남성 후보를 큰 표 차로(대의원 41명 가운데 25명의 지지) 물리치고 획득한 대단한 성과였다. 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발효중인 상황에서, 회사 쪽과 관계기관의 개입을 이겨내고 조합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여성 집행부가 탄생했다는 것은 당시로선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후 민주노조운동이 부각되기 시작했고, 동일방직을 시작으로 다른 노동조합에서도 여성 지부장이 속속 선출되었다.
주길자 지부장은 자신이 누구보다도 여공의 가슴에 맺힌 사연을 잘 알고 있으며 여성 노동자에게는 여성이어야만 이해가 되는 여러 가지 애로사항이 많기 때문에 여성 지부장 혹은 여성 노조간부가 필요하다는 당선 소감을 밝혔다.
그런데 애당초 지부장 후보로 추천됐던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앞서 노조 대의원 선거가 끝나고 지부장에 누구를 세울 것인가를 두고 긴밀히 내부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런 사실을 눈치챈 중앙정보부에서 미행하기 시작하자 하는 수 없이 한밤중에 회의를 하기도 했다. 처음엔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산선)와 관련이 있는 남성 조합원이 추천되었다. 하지만 논의 끝에 역시 여성 노동자들의 처지는 여성이 잘 알고 대변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났고, 전 집행부에서 부녀부장을 지낸 주길자로 결정되었다. 동일방직에 입사한 지 7년째인 그는 회사 사정을 잘 알 뿐만 아니라 노조 활동 경력도 있었다.
다만, 그가 가톨릭노동청년회(지오세) 출신도 산선 출신도 아니라는 점이 걸렸다. 하지만 당시에는 어용의 길을 걷기 이전의 섬유본조에서 진행했던 간부 대상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부족하나마 노조의 목적이나 조합원의 자세 등에 대한 인식은 충분히 있을 것으로 판단됐다. 그런 한계를 고려해 주길자 집행부는 모든 사안을 지부장 단독으로 처리하는 일 없이 다수결로 결정하도록 합의를 했다.
회사 쪽에서는 예년과는 다르게 여성 대의원이 과반수 선출되고 자신들이 원하는 지부장이 선거에서 떨어지자 뭔가 잘못돼 가고 있다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그때까지 회사를 자유롭게 드나들던 산선의 조화순 목사도 출입을 금지해 버렸다. 또 ‘무식한 여자들 주제에 뭘 하겠냐’며 보나마나 1년이 지나지 않아 내놓고 항복할 거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노조 집행부가 모두 여성들도 채워진 건 남성 조합원들이 회사의 눈치를 보면서 함께하려 들지 않았고, 또 여성 밑에서 일하는 걸 원치 않아서 그렇게 된 것도 있었다.
사실 정기대의원대회에서는 한가지 해프닝이 있었다. 지부장에다 간부진을 모두 여성으로 내정하고 연습까지 마친 민주노조 준비팀은 몹시 긴장된 상태였다. 소문을 듣고 노동청·한국노총·섬유본조 관계자와 담당 형사 등 많은 사람이 몰려와 지켜보고 있었다. 준비한 대로 진행되어 주길자 지부장이 확정되자 준비팀은 펄쩍펄쩍 뛰며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올렸다. 이어 주 지부장의 사회로 임원 선출 등을 마치고 대회를 계속 진행하는데, 남성 대의원들이 여기저기서 큰 소리로 반대를 위한 반대에 불과한 의견 개진을 하며 총회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당선의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데다 극도로 긴장 상태였던 주 지부장은 너무 당황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이크를 잡고 있던 그가 기절을 하는 바람에 총회장이 발칵 뒤집혔다. 곧바로 주 지부장이 업혀 나가고 잠시 휴회를 한 뒤, 총무로 선출된 이영숙이 총회를 마무리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이 돌발사태로 반대파들은 두고두고 여성 지부장을 비아냥거렸다.
동일방직 노조 대의원 이총각에게는 이전에 지도투사로 활동했던 것과는 다른 사명감이 무겁게 다가왔다. 이제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봉사활동이 아니라, 조합원들이 손에 쥐여준 깃발을 힘차게 흔들어야 할 위치에 와 있었다. 게다가 집행부가 구성되면서 그에게는 쟁의부장이라는 책임이 하나 더 주어졌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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