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4월 동일방직 민주노조 지부장을 맡은 이후 이총각은 사내 조합원 교육은 물론 와이에이치(YH)무역을 비롯한 다른 사업장의 노조 간부들에게도 동일방직의 투쟁 경험을 나누는 활동을 폈다. 사진은 와이에이치무역 노조 최순영 지부장이 76년 5월 정기대의원대회를 진행하는 모습.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40
이총각에게 1977년은 힘들었던 만큼 의미도 큰 한 해였다. 전임 이영숙의 갑작스런 사퇴로 동일방직 민주노조 지부장 자리를 받아들인 그는 마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올라탄 것 같았다. 지부장이 되자마자 조합원 탈퇴 사건과 유재길 해고 복직 투쟁을 이끌며, 지부장은 조합원으로서 조합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고 한목소리로 함성을 지르는 것과는 다른 소명이 있음을 충분히 깨달아야 했던 하루하루였다. 총각은 지오세(가톨릭노동청년회)를 통해 노동조합을 알게 되었고 행복한 마음으로 활동을 했지만 자신이 지부장까지 될 재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순한 성격이라 받아들이고 난 뒤에는 흔들림 없는 활동을 이어갔다.
총각은 지부장으로서 조합원 교육을 진행하면서 조금씩 달라지고 강건해지는 조합원들을 볼 때마다 뿌듯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사내 교육뿐만 아니라 다른 사업장 교육까지 가야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특히 와이에이치(YH)무역 노조 간부들을 대상으로 했던 교육이 기억에 남았다. 동일방직 노조의 투쟁 사례는 노조 간부로서 그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교육 자료가 되었다.
당시 와이에이치무역은 “가발산업은 사양산업이다”, “회사의 자금사정이 악화되어 임금을 인상하면 공장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는 등 엄살을 부리며 노동조합과 제대로 된 임금협상을 거부하고 있었다. 75년 5월 노조 결성 이후 회사 쪽의 수없는 부당노동행위에 단련이 된 노동자들은 노조 집행부의 지휘 아래 끈질긴 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결국 77년 7월15일 정부가 정한 최저임금 수준에도 미달하는 정도의 임금인상이 이뤄졌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조합원들의 놀라운 의식수준 향상을 확인할 수 있었고, 흔들림 없는 단결력은 노동조합에 대한 믿음을 한 단계 높이는 성과를 가져왔다.
와이에이치 회사 쪽은 노조 활동이 활발해지고 조합원들의 단결력을 강화시키는 것이 생산직 여성 노동자 90%가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고는 7월22일 같은 반원들끼리 한방을 사용했던 규정을 일방적으로 바꿔 인원 배치를 전면적으로 바꿔버렸다. 마침 지부장인 최순영은 일본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석하느라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게다가 사무장 박태연은 선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처리가 미숙한 틈을 타서 전격적으로 단행한 것이었다. 조합원들은 즉각 거부 의사를 밝히고 일요일인 다음날 모두 외출해버렸다.
그러자 회사는 그다음 월요일 아침 작업을 전면 중단시키고는 기숙사생들을 모두 모이게 하더니 새로 배정된 방으로 옮기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모두 각자의 방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회사의 요구를 완강히 거부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관리직 사원과 남자 조합원들이 몰려와서는 잠긴 문을 망치로 부수고 짐을 밖으로 내동댕이쳐 버렸다.
하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이었다. 빗속에서 흙탕물과 함께 나뒹구는 짐을 부여안고 여자 조합원들은 울며불며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지만 회사 쪽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결국 비에 젖은 짐을 들고 재배치된 방으로 갈 수밖에 없었지만 이 소동은 오히려 조합원들의 결속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노조는 이런 강제 방배치가 ‘근로기준법 99조와 100조를 위반한 행위’라고 지적하고, 방지를 위해 기숙사자치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회사는 거부하고 싶었지만 고발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회사는 노조의 힘이 강화되면서 예전처럼 막대한 이익을 낼 수 없게 되자 반복적인 휴업과 인원감축으로 조합원들의 불안을 고조시켰다. 가발산업이 사양화되어 휴업을 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작업물량을 하청으로 빼돌리고 본공장은 휴업을 하는 식이었다. 작업 분위기가 갈수록 불안해지자 77년 6~9월 사이에 400여명의 인원이 줄었다. 마침내 10월1일에는 “정부의 시책으로 가발과(500명)를 충북 청산에 있는 공장으로 이동시킨다”는 회사의 공고를 보고 사흘 만에 무려 430명이 자진사표를 내고 말았다. 노조는 ‘정부 시책’이라는 말에 속아 넘어가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 결국 회사는 위장이전 수법으로 해고수당 한푼 없이 500여명을 해고한 셈이었고, 노조의 힘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는 2년 뒤 벌어질 ‘와이에이치 농성 사건’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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