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교감쌤’이 아이들을 야릇하게 훑어보며 말합니다. “다리가 아주 섹시해.” 여자 ‘교련쌤’은 친구의 등짝을 후려치며 외칩니다. “속옷을 왜 이런 걸 입어. 요새 밤에 업소 나가?” 교사들에 의한 성폭력 사건으로 시끌시끌한 어느 학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1990년대, 제가 다니던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던 일입니다.
안녕하세요. <한겨레>에서 교육 부문 취재를 맡고 있는 엄지원입니다. 보시다시피 저 자신 ‘비교육적’이며 ‘반교육적’인 환경에서 자랐습니다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십여년 만에 찾은 학교 현장은 달라진 게 많지 않더군요.
서울의 ㄱ고등학교에서 일부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춘향이’, ‘황진이’ 같은 별명을 지어주고 수업시간에 음담패설을 늘어놓는가 하면 동료 교사들까지 성추행한 의혹으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1년 넘게 100명이 넘는 학생과 교사들이 5명의 간부 교사들로부터 성추행, 성희롱에 시달렸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교사가 통제받지 않고, 상습적으로 폭력을 휘두를 수 있었을까.” 이 사건을 취재하며 가슴속에 둔 가장 큰 질문이었지요.
어느 조직에나 ‘문제적 인간’ 한두명쯤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50여명의 교사 가운데 5명이 ‘문제적’이라면 분명 조직 자체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 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몇 개의 열쇠가 있습니다.
ㄱ고는 세워진 지 얼마 안 된 신설 학교입니다. 가해 교사로 지목된 이들 대부분은 이 학교의 ‘개교 공신’입니다. 신설 학교에는 학교의 물적, 제도적 토대를 세우는 개설 요원이 투입됩니다. 7명의 개설 요원 중에는 교장과 가해 교사 3명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가해 교사들은 ㄱ고의 교풍을 세운 이들인 셈이지요.
신설 학교 특유의 어수선한 분위기는 이들이 ‘군기’를 잡는 데에 유리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학생 6명을 성추행한 혐의로 이미 지난 4월 검찰에 송치된 물리교사는 개설 요원 중 한 명이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입시 전문가’입니다. 겹겹이 감투를 쓴 교사에 대해 동료 교사는 “입시, 경쟁에 대한 관념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는 학생주임으로 아이들의 생활지도를 맡기도 했습니다. 특별반을 만들어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을 따로 지도하고, 가혹한 벌점제도로 학생들을 평가하는 데 앞장서 온 것으로 알려졌지요.
수업 중 하품만 해도 벌점 1점이 부과됐고 이성간에 손을 잡고 다니다 눈에 띄면 3점의 벌점이 매겨졌습니다. 아이들이 찍소리도 할 수 없게 통제한 것이지요. 벌점이 누적되면 강제 전학과 퇴학 등의 조처가 잇따랐습니다. 지난 한해 이 학교에서 학업을 중단한 학생은 52명에 이릅니다. 30여명의 전학생을 제외해도, 전체 학생의 10%가 퇴학 또는 자퇴로 학교를 더 다니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유학 등을 준비하기 위해 그만둔 학생들을 고려하더라도 서울(1.37%)이나 전국(1.4%) 평균보다 7배나 많은 수입니다. 학교가 아이들을 보듬고 고민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제거’하는 방식으로 교육해왔을 것이라는 의혹을 품게 되는 대목입니다.
이런 폭력적인 환경에서 아이들이, 그리고 젊은 교사들이 과연 합리적인 문제 제기를 할 수나 있었을까요. 지난해 2월 한 여교사가 회식 장소에서 일어난 성추행을 알렸을 때 학교는 미적지근하게 버티다 가해 교사를 1년 뒤에야 다른 학교로 전출 보냈습니다. 1년여 동안 학생들을 성추행하다 올해 피해 학생 부모의 고소로 경찰 수사를 받고 직위해제된 물리교사는 직위해제 기간 중 학교를 드나들며 체육동호회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고통 끝에 피해 학생 중 일부는 전학을 택했습니다. 학교에서 그를 맞닥뜨린 아이들은 “(가해 교사가) 조만간 학교로 돌아올 것 같다”며 자기들끼리 두려움에 떨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학교를 졸업하면 다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건이 드러난 뒤 서울시교육청의 조사에서 어떤 아이들은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그게 성희롱인지 몰랐어요.” 이렇게 답한 아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학창시절, 우리도 그랬습니다. 어딘지 불쾌해도 한 대 맞을까봐, 괜히 미움받을까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성희롱만큼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아이들의 두려움 섞인 침묵입니다. 이번 사건이 ‘가해자 처벌’에 그치지 않고 ‘민주적인 학교 문화 만들기’로 끝맺음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엄지원 사회정책부 기자 umkija@hani.co.kr
엄지원 사회정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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