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대해서는 ‘독재’라는 표현을 2번밖에 사용하지 않는데 우리 남한 정부를 기술하면서는 24번 사용했다.”
김재춘 교육부 차관이 지난 12일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발표 기자회견장에서 검정 교과서의 대표적인 문제점으로 지적한 부분이다. 북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서술이 적은 반면, 남한에 대해서만 과도하게 비판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정부는 검정 교과서가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의 ‘공’과 ‘과’ 중에 ‘과’만을 부각시킴으로써 학생들에게 남한 정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고 주장한다.
건국·경제발전 제대로 안다뤘다? 집필기준 따라 이승만 업적 기술 “수출 4천만달러에서 100억달러” 박정희 공로는 ‘한강의 기적’으로
하지만 <한겨레>가 15일 교학사·금성·두산동아·리베르·지학사·미래엔·비상교육·천재교육 등 현행 8종 검정 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남·북 독재 관련 서술을 분석한 결과, 모두 교육부의 집필기준과 전체 교과서에서 남·북이 차지하는 비중에 따라 양쪽의 독재를 적절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뉴라이트와 정부 여당의 주된 불만인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관련 서술도 교육부의 집필기준에 따라 공과 과를 모두 균형있게 다루고 있었다.
박현서 전 한양대 교수(왼쪽 두번째)등 퇴임한 교수·교사로 이뤄진 ‘원로 교육자 회의’ 회원들이 15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 원로 교육자들은 성명에서 “국정 교과서는 정권 교과서이자, 죽은 역사 교과서다. 역사조차 장악하려는 음모에 맞서 분연히 일어선다”고 밝혔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 이승만·박정희 공로 제대로 안다뤘다?
정부 여당의 역사 인식은 뉴라이트 성향 역사학자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뉴라이트는 현행 검정 교과서들이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독재)만 강조하고 ‘공’(건국·경제발전)은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한마디로 ‘건국의 아버지’인 이 전 대통령과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박 전 대통령의 업적을 폄훼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교육부가 제시한 가이드라인을 따라야 하는 교과서들이 이승만·박정희 두 전 대통령을 ‘폄훼’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2009 집필기준을 보면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으로부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받은 사실에 유의한다’고 돼 있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정부수립 업적’을 다루지 않을 수가 없다. 지학사는 349쪽에서 “헌법을 제정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 유엔 총회는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에서 선거를 통해 수립된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승인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다른 교과서들도 이 부분을 거의 똑같이 서술하고 있다.
특히 박정희 정부 기간의 경제성장은 현대사에서 가장 비중있게 다루는 부분 중 하나다. 정치사 서술과는 달리 경제사 서술에서는 ‘경제 개발 계획과 발전상’을 상세히 다루도록 하기 때문이다. 2009 집필기준은 ‘산업화를 통해 이룩한 경제 발전의 성과와 과제 (…) 저개발 국가였던 우리나라가 정부 주도의 경제 개발 계획을 기반으로 이룩한 경제 발전의 과정을 서술한다’고 지침을 주고 있다. 미래엔 338쪽을 보면 ‘고도성장과 사회·문화의 변화’ 단원에서 “1961년 4천만 달러에 머물던 수출액이 1977년 11월 30일 100억달러를 돌파 (…) 세계는 우리의 경이로운 경제 성장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일컬었다. 이러한 기적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라고 돼 있다. 두산동아 304쪽 역시 “이 기간(박정희 정권)에 한국 경제는 ‘한강변의 기적’이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로 눈부시게 성장하였다”고 기술한다.
북한에 비해 남한 독재만 부각? ‘독재’ 북 2, 남 24번은 서술분량 탓 북 권력세습·인권침해 자세히 비판 남 독재기술은 민주화 시련 의미로
미래엔의 대표집필자인 한철호 동국대 교수(역사교육과)는 “검정 교과서들이 ‘한강의 기적’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썼는데 박정희 대통령을 폄훼했다고 하느냐”며 “모든 것엔 명암이 있고, 산업화 역시 비판할 부분도 있지만 경제적인 수치 면에서 발전한 것도 사실이라 공과 과를 함께 다뤄줬다”고 말했다.
8종 고교 한국사 교과서 이승만·박정희 공과 서술
■ 독재 서술, 북한 2번·남한 24번?
김 차관이 문제삼은 고교 한국사 교과서는 점유율이 가장 높은 미래엔 출판사 교과서다. 한철호 동국대 교수는 “‘독재’라는 표현이 북한보다 남한에 많은 건 ‘교과서 서술 분량의 차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 교수는 “우리나라 교과서니까 당연히 남한 관련 서술이 압도적으로 더 많다. 게다가 북한에 대해 자세히 쓰면 친북이라고 매도하고 검정 통과도 안 되기 때문에 북한에 대해 쓸 수 있는 분량이 많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겨레>가 가장 최근 판인 2014년 미래엔 고교 한국사 교과서를 확인해 보니, 해방 이후를 다룬 부분 58쪽 가운데 북한 관련 서술은 2.5쪽(4.3%)이고 나머지는 모두 남한 관련 서술이었다. 따라서 ‘독재’라는 표현도 이에 비례해 남한 관련 서술에서 더 자주 등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미래엔 350쪽의 ‘북한의 변화와 평화 통일을 위한 노력’ 부분을 살펴보면, 이 교과서가 북한의 독재에 대해 얼마나 비판적인지 확인할 수 있다. “북한의 공식 명칭은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1인 독재와 아들, 손자로 이어지는 3대 권력 세습을 이루었다. 더구나 존중받아야 할 ‘인민’은 오늘날 굶주림에 시달려 국경을 넘는 실정이다. 북한 사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라고 북한의 실상을 매우 비판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정부 여당이 좌편향의 예로 자주 언급하는 금성출판사 역시 “김일성은 자신의 반대 세력들을 제거하면서 권력을 다져나갔다. (…) 이를 통해 유일 지배 체제를 확립해 나갔다”(407쪽) “대표적인 북한의 인권 침해 사례는 공개 처형, 정치범 수용소, 성분 분류에 따른 인민들의 차별 대우 등이다”(411쪽) 등 북한에 대한 비판적 서술이 많다. 교육부의 2009 집필기준은 “북한의 세습 체제 및 경제 정책의 실패, 국제적 고립에 따른 체제 위기” 서술을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하고 있고, 현행 검정 교과서들은 이 집필기준을 잘 따랐기 때문에 검정을 통과할 수 있었다.
검정 교과서들이 남한의 독재를 서술한 것도 교육부의 집필기준에 따른 조처다. 현행 교과서들은 대부분 현대사를 정치사와 경제·사회·문화사로 구분해서 서술한다. 이 가운데 정치사 부분의 집필기준이 독재와 민주화 과정을 중심으로 서술하도록 돼 있다. 2009 집필기준을 보면 “4·19 혁명으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발전과정에서 5·16 군사정변 등 정치변동과 (…) 민주화 과정이 장기 집권 등에 따른 독재로 시련을 겪기도 하였으나 이를 극복하고 평화적 정권 교체를 정착시키는 밑거름이 되었음을 유의”해 교과서를 서술하라고 돼 있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자칭 ‘공산주의 감별사’ 고영주, 유신시절로 돌아가고 있는 국정교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