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만난 한 중년 여성은 은퇴한 남편과 다녀온 유럽여행의 에피소드를 전했다. 이 여성은 여행을 떠나기 위해 짐을 꾸리느라 서두르다가 실수로 남편의 전화기를 집 안에 둔 채 공항으로 출발했다. 전화기를 집에 놓고 온 것을 공항에 도착해 알게 됐지만, 집에 갔다 올 겨를이 없어 그대로 비행기를 타게 됐다. 여행 초반 남편은 전화기가 없다며 아내를 탓하더니, 본격적으로 여행이 시작되자 오히려 남편은 전화기에서 해방된 것을 좋아했다. 다른 일행들은 수시로 전화기를 들여다보고, 풍경을 감상할 겨를도 없이 사진을 찍느라 허둥댔지만 전화기가 없는 남편은 느긋하게 풍경과 명소를 감상할 수 있게 돼 오히려 아내에게 고마워하게 됐다는 얘기였다.
여행은 일상을 벗어나 낯선 곳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는 비일상적인 의례였지만, 최근에는 달라졌다. 장소만 달라졌지 행동이나 경험에서 새로운 것이 드물다. 거기에는 스마트폰과 인터넷의 영향도 적지 않다. 한국인만의 특성도 아니다. 최근 관광버스를 서울 도심에 세워두고 관광을 하는 중국인 관광객들도 우리 모습과 비슷하다. 남대문, 청계천, 광화문 등 명소 앞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사진을 찍고, 버스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도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경우가 많다.
낯선 곳으로 여행을 왔지만, 새로운 문물을 감상하거나 경험을 보태기보다는 늘 하던 대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걸으면서도 손바닥 화면에 눈을 집중한다. 사진의 배경은 바뀌었지만, 스마트폰과 밀착해 지내는 시간의 모습은 여행지에서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한때 외국여행을 가거나 비행기를 타면 통신망과 단절되는 경험이 기본으로 주어졌지만, 이제는 그마저 달라졌다. 외국여행 중에도 무제한 데이터 로밍이 일반화되었고, 점점 더 많은 항공사가 비행 중 와이파이 서비스 제공에 합류하고 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은 놀랄 만큼 편리함과 강력한 연결을 가져다준 마법과 같은 도구이지만, 동시에 이는 기존의 소중한 개별적 경험들도 모두 자그마한 액정 속으로 빨아들여 사라지게 하고 있다. 스마트폰이 없었던 덕분에 여행이 더 즐겁고 풍부한 경험이 됐다는 말은, 꼭 여행지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필요한 상황에만 선택적으로 인터넷과 디지털 세상에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해졌다.
구본권 사람과디지털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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