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3일 서울 관악구 인헌고 앞에서 열린 ‘인헌고등학교 학생수호연합’의 기자회견에서 대변인 최아무개(18·마이크 든 이)군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전광준 기자
“타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주장하며 심지어 약자에 대한 공격을 주장하기까지 하는 일베(일간베스트)적 견해를 학생들이 다양한 여러 견해 가운데 하나로 인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혐오와 폭력이 팽배할수록 그것의 부당함을 인지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의 필요성은 커진다.”(강민정 징검다리교육공동체 상임이사)
18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의회 제1대회의실에서 서울시의회와 (사)징검다리교육공동체가 공동 주최한 ‘인헌고 논란을 통해 본 학교 민주시민 교육’ 토론회가 열렸다. 지난 10월 서울 관악구의 인헌고등학교 일부 재학생이 ‘학생수호연합’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교사들의 ‘정치 편향’을 주장하며 촉발된 이른바 ‘인헌고 사태’를 계기로 학교와 교사가 사회적 쟁점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논의의 장을 열기 위해서다.
사태 직후 <한겨레> 취재 결과, 인헌고 재학생 다수가 ‘정치 편향’을 주장한 학생의 주장이 다소 과장됐다고 반박한 바 있다. 이 학생은 동성애자 등 소수자나 난민에 대해 혐오적인 관점을 주장하는 한편, 여성혐오적 발언이 강하고 특정 행동을 하며 여성 선생님과 학생들을 조롱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하지만 보수언론·정당이 교사의 ‘정치 편향’ 논란을 계속 제기하는 상황이다.
이날 ‘학교 사회현안교육(정치교육)의 쟁점과 해법’을 주제로 발표에 나선 강민정 상임이사는 “‘인헌고 사태’를 두고 일부 언론과 매체들이 정치적인 문제를 다루는 교육과 정치 편향적 교육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동일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강 이사는 “아이들은 이미 인터넷을 통해 사회 현안에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데 학교에서만 금지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며 “이런 환경일수록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문제들을 교실과 학교 안으로 들여와 교육적으로 다루는 일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고 강조했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내세우며 사회 현안이나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일을 제한할 것을 주장할 게 아니라 이런 주제들을 다룰 때 ‘교육적으로 올바른 것이 무엇인가’하는 문제에 대한 ‘기준과 원칙’을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강 이사는 우리보다 훨씬 일찍 학교 안에서의 민주시민교육(정치교육)을 시작한 독일과 영국의 사례를 참고 사례로 꼽았다. 독일에서 1976년 ‘보이테스바흐 합의 원칙’을 정리해 학교 현장에 적용하고 있다. 교사에 의해 강압적인 정치적 교화를 금지하고, 논쟁적 주제를 회피하지 않고 토론하고, 판단은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모든 주제가 교실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영국 민주시민교육 원칙을 밝히고 있는 ‘크릭 보고서’에서는 “무조건적인 중립 또한 옳은 것이 아니다. 인권과 같은 주제를 다룰 때는 중립적인 것이 오히려 나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강 이사 역시 “교육전문가들은 정치교육에서 모든 입장이 다 재현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되며 무엇보다 인권을 무시하는 견해는 여타 견해들과 동등한 권리를 지닐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때 교사는 학생들을 개인적으로 비난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인권을 무시하는 그들의 입장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을 거부해서도 안 된다.
강 이사는 “여성혐오나 인권과 주권의 침해를 옹호하는 일베식 주장을 지지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단호한 입장을 취하도록 교육하는 일은 옳을 뿐 아니라 필요한 일”이라며 “(그렇지 않으면) 세상이 극단적 혐오주의와 이기주의, 약자에 대한 무시와 지배, 경제적 이익 우선주의로 가득 차 그것이 마치 하나의 당연한 입장인 듯 착각에 빠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한국 교육 현장에서는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규정하고 있는 헌법 제31조 조항을 근거로 교실에서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일 자체를 금기시하는 풍토가 오랫동안 지배해왔기 때문이다. 이날 또 다른 주제발표에 나선 김원석 성공회대학교 민주주의연구소 연구위원은 “한국에서는 교육과 정치의 완전한 분리라는, 가능하지도 그리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전제 위에서 굉장히 ‘자의적’인 방식으로 정치적인 것의 배제를 위한 수단으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개념이 사용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난해 서울시교육청이 학교민주시민교육 진흥 조례를 제정하는 등 일부 시·도 교육청 차원에서 정치교육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그나마 희망적이다.
이날 토론자로 나선 김홍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서울지부 정책실장은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교사들에게 필요한 것으로 두 가지 용기를 꼽았다. 첫째로 사회에서의 논쟁을 교실에서 그대로 재현하는 ‘용기’다. 중립이라는 허상 아래 사회적으로 논쟁적인 사안에 대해서 무관심한 시민으로서의 모습을 학생들에게 보이는 것 그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인류 보편의 가치에 위배되는 사항에 대해서는 학생들에게 철저히 가르치는 용기다. 김홍태 정책실장은 “교사는 인류 보편가치의 수호자이자 역사정의의 설파자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토론회에는 인헌고 교사가 직접 나와 현재 학교 상황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다. 이 교사는 “외부에서는 이제 인헌고 사태가 잠잠해졌다고 생각하지만 지금도 많은 학생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받고 있다”며 “보수 유튜버들의 생방송으로 학생들의 초상권이 침해되는 등 심리적으로 매우 괴로운 상태”라고 호소했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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