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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내려받고’ ‘퍼트렸다’ 하면 될 걸 ‘다운로드’하고 ‘유포했다’라니

등록 2020-10-26 18:29수정 2020-10-29 20:08

[쉬운 우리말 쓰기]

연재ㅣ4회 공익광고 속 우리말

신문사에서 일하다 보면 거의 날마다 범죄 소식을 듣게 된다. 온갖 범죄를 보다 보니 웬만한 일에는 크게 놀라지 않는데, 너무나 끔찍해 다시 생각만 해도 떨리는 사건이 있다. 엔번방, 웰컴투비디오 같은 디지털 성범죄 보도를 볼 때이다.

올해 초 체포된 범죄자 중 한명은 카메라 앞에 섰을 때도 피해자에게 사죄하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고, 덤덤한 얼굴로 제가 하고 싶은 말만 툭 던지고 갔다. 사람이란 도대체 어디까지 나빠질 수 있나 깊은 회의까지 들게 한 사건이다.

디지털 성범죄에 경고를 날리는 공익광고가 있다. ‘‘공범’까지 20% 남았습니다’라는 제목의 2019년 공익광고제 수상작이다.

‘공범’까지 20% 남았습니다

죄의식 없이 쉽게 다운로드하고 유포되는 불법 촬영물

피해자에겐 유포자도 다운로드한 사람도

인생을 망가뜨리는 똑같은 가해자입니다.

불법 촬영물 다운로드

받는 순간 당신도 범죄에 가담한 공범입니다.

시의성도 있고, 중요한 주제를 다룬 좋은 광고인데, 문장에서 걸리는 부분이 있다.

*다운로드하고 유포되는 → 퍼뜨리고 내려받는

*유포자도 다운로드한 사람도 → 퍼뜨린 사람도 내려받은 사람도

*불법 촬영물 다운로드 받는 순간 → 불법 촬영물 내려받는 순간

전문용어 중 우리말로 바꾸기 곤란한 말은 더러 외래어로 받아들여 그대로 쓸 수도 있겠다. 그런데 컴퓨터, 더 넓게는 정보통신 쪽 용어는 ‘다운로드’처럼 굳이 영어를 쓰지 않아도 되는 쉬운 말까지 영어를 쓸 만큼 영어 남용이 심각하다. 이런 쉬운 말까지 영어를 쓰다 보면 우리말이 설 자리는 점점 더 좁아지고, 사람 사이 소통도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정보 불평등까지 낳게 된다.

‘유포하다’는 일상에서 잘 쓰지 않는 말이다. 같은 뜻의 쉬운 우리말 ‘퍼뜨리다’가 있다. 먼저 퍼뜨려야 내려받을 수 있으니, ‘퍼뜨리고 내려받는’으로 순서를 바꿨다.

그런데 왜 ‘유포하는’이 아니고 ‘유포되는’일까. ‘유포되는’이라고 하면 이 일을 한 사람이 슬쩍 빠져버린다.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유포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피동문을 쓰다 보면 문장에서 행위의 주체가 흐려져 책임 소재를 알 수 없게 된다. 관청에서 쓴 피동문을 살펴보자.

*정책 입안 단계부터 지역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고려돼야 한다. → 영향을 고려해야

*성별에 따른 차이와 특성을 고려한 도시재생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서울시는 밝혔다. → 도시재생을 이루기

영향을 고려할 사람이 정책 입안자인데 누구에게 고려하라는 말인지, 도시재생은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서울시가 이루는 것 아닌가. 이렇게 자기 일을 마치 딴 사람의 일인 양 말하면 ‘유체이탈화법’이라고 놀림을 받게 된다.

*“우리 아이들에게 더 공정한 교육기회가 주어지도록 만들겠습니다.”

서울시교육청에서 2015년에 만든 공익광고 ‘청렴한 학교문화’편에 나오는 말이다. 이 문장을 보면 교육 기회를 주는 주체가 따로 있고, 서울시교육청은 그 주체가 기회를 공정하게 주도록 만들겠다는 것인데, 공정한 교육 기회는 누가 주는가. 나라의 공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중요한 교육기관이 “우리 아이들에게 더 공정한 교육기회가 가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피동형이 아니라 능동형 문장으로 믿음직한 말을 해줄 수는 없을까. 무엇보다 사교육이 따로 필요 없을 만큼 공교육의 질을 높일 방법을 찾아내고 실천 방안을 보여주면서 다짐하고 약속해준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신정숙 교열부 기자 bom1@hani.co.kr

감수 상명대학교 국어문화원 특임교수 김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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