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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경주하는’ ‘격려시키는’…어려운 한자말에 어법도 맞지 않아

등록 2020-11-09 18:10수정 2020-11-10 15:50

[쉬운 우리말 쓰기]

연재ㅣ10회 박물관 속 우리말

국립전주박물관에는 다른 국립박물관에 없는 상설전시실로 ‘선비문화실’이 있다.

전시실 안으로 들어가 처음 마주한 벽에는 ‘선비’가 “어질고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의 ‘선배’에서 온 말이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날마다 부르고 듣는 호칭인 ‘선배’가 선비의 어원일 줄이야! 국어사전에는 선배를 “같은 분야에서, 지위나 나이·학예 따위가 자기보다 많거나 앞선 사람” 정도로 간단히 풀이해 놓았는데…. 제대로 지식을 갖추는 것도 쉽지 않지만, 어진 성품을 갖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선배라는 말의 무게가 전과 다르게 느껴진다. 요즘 선배와 후배는 또 어떤 관계인가, 어떤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는가 생각하게 된다.

박물관 전시실에 있는 안내문은 쉽고 간결해야 관람객들의 유물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 지난해 6월 국립전주박물관 ‘선비, 글을 넘어 마음을 전하다’ 전시회 관람객에게 큐레이터가 설명해주고 있다. 국립전주박물관 제공
박물관 전시실에 있는 안내문은 쉽고 간결해야 관람객들의 유물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 지난해 6월 국립전주박물관 ‘선비, 글을 넘어 마음을 전하다’ 전시회 관람객에게 큐레이터가 설명해주고 있다. 국립전주박물관 제공

전시실에는 주요 선비들의 삶과 그들의 예술 세계를 소개하는 모니터가 있다. 모니터 화면을 눌러 보니 김득신, 김정호, 김정희, 류성룡, 박지원, 이원익, 이이, 이황, 정도전, 정약용, 황윤석, 황현, 황희가 나온다. 선비 한 사람 한 사람의 면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각 안내문이 대체로 쉽고 간결했는데, 아래 예를 든 부분에서 어려운 말이 나왔다.

* 영의정 자리에 올라 왕을 수행하는 한편, 전국 각지에 격문檄文(격려 시키는 내용의 글)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고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치하여 군대를 편성하는 데에도 힘을 쏟았다. -서애 류성룡 소개글

‘격문’은 “1 어떤 일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어 부추기는 글. 2 급히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각처로 보내는 글. 3 군병을 모집하거나, 적군을 달래거나 꾸짖기 위한 글. ≒격, 격서.”이고, ‘격려’는 “용기나 의욕이 솟아나도록 북돋워 주는 것”이다.

위 안내문에 ‘격문’은 1, 2, 3번의 뜻이 다 들어 있는데, “격려 시키는 내용의 글”로 풀이한 것에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격문에는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왜구에게 침략당한 나라의 형편을 설명하고, 의분을 일으키며, 백성들이 힘을 모으면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격려하는 내용도 들어 있을 것이다.

그 모든 내용을 담기에 ‘격려시키는’이란 낱말은 부족하다(게다가 ‘격려시키다’는 ‘격려하는’으로 바로잡아야 하는 잘못된 말이다). 어려운 한자말의 뜻을 풀어주는 것은 좋은데, 풀이말이 더 정확하고 바른 말이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 박지원의 삶에서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을 경주하는 실천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게 된다. -연암 박지원 소개글

다하는,

* 사후 이원익은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되었다. -오리 이원익 소개글

배향되었다. 신주를 모셨다. 제사를 지냈다.

‘경주하다’는 “1 강물이 쏜살같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다. 2 (비유적으로) 비가 퍼붓듯 쏟아지다. 3 물 따위를 기울여 붓거나 쏟다. 4 힘이나 정신을 한곳에만 기울이다.”라는 뜻이 있는데, 들어서 이런 말뜻이 잘 떠오르지 않는 어려운 말이다.

‘제향’은 제사의 높임말이고, ‘배향’(종향)은 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문묘나 사당, 서원 등에 모시는 일이다. 둘 다 유교의 전문용어이니 일반 사람들은 쓰지 않는 말이라 이해하기 어렵다. ‘이원익은 죽은 뒤 시흥의 충현서원에서 제사를 지냈다’로 문장을 고치면 뜻이 더 잘 전달된다.

상설 전시실인 ‘선비문화실’에는 ‘선비’의 어원을 설명하는 안내문이 있다. 신정숙 기자
상설 전시실인 ‘선비문화실’에는 ‘선비’의 어원을 설명하는 안내문이 있다. 신정숙 기자

조선의 대표 선비 중 한 분인 삼봉 정도전은 “나라도, 임금도 백성을 위해 존재할 때만 가치가 있다”(<삼봉집>)고 했다. 그는 임금이 나라의 주인이던 시대에 임금보다 나라보다 백성의 가치를 위에 둘 정도로 앞선 사상가였다. 그러나 그를 비롯한 선비들은 임금이 백성을 위해 만든 쉬운 ‘한글’을 쓰지 않고 백성들이 알 수 없는 어려운 한자로 글을 쓰고 한자말을 섞어 말하며 백성을 지식의 세계에서 소외시켰다. 백성을 위한다 했지만 백성들이 자신들과 같이 지성을 갖는 것은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성의 말과 글인 조선말과 한글이 한자와 한자말에 내주었던 주인 자리를 차지해 학문하는 도구가 되고 문학과 예술을 하는 데 쓰였다면 조선은 어떤 역사를 갖게 되었을까? 나라의 주인이 국민인 오늘날에는 국민이 국민을 위해야 진짜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말이 이 땅의 주인 말이 되는 ‘말의 민주화’가 민주주의 실현의 바탕이라고 생각한다.

신정숙 교열부 기자 bom1@hani.co.kr

감수 상명대학교 계당교양교육원(분원) 부교수 서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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