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인정한 청년의 연령대를 벗어나 세금 우대도 못 받는 처지에 이르렀다. 어디 세금뿐인가. 청년 임대주택, 일자리를 찾는 청년에게 제공되는 지원금, 청년 우대 대출은 물론이고 사회 초년생을 위한 각종 예금·보험도 가입할 수 없다. 심지어 서울시 내 청년 공간도 예약할 수 없다. 게티이미지뱅크
월급이 느닷없이 10만원이나 줄었다. 연봉은 2년째 동결이건만, 떼어가는 세금이 10만원이나 불어나 통장에 입금되는 총액이 감소한 것이다. 직장인 월급봉투는 유리봉투라고 투덜대는 글은 아니다. 사실 월급이 입금되면 카드 회사에서 ‘퍼 가여~ 띵동’ 하고 빛의 속도로 문자가 오기 때문에 월급이 줄어든 것도 모르고 있었다. 바로 총무팀 담당자에게 문의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늘그니님, 확인해보니 작년까지는 청년 세금 우대를 받았고, 올해부터는 청년이 아니라 세금을 더 떼는 거네요.”
두둥! 내가 청년이 아니라니! 청년의 기준은 몇살까지일까. 지방자치단체마다 연령 기준을 달리 책정하는데 서울시는 청년 임대주택 신청 시에는 만 34살, 그 외 일자리 및 지원금 중에는 만 39살까지 신청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유엔이 평균 수명의 고령화를 측정해 새로운 연령 표준 규정을 내놓았는데, 청년의 기준이 무려 18살부터 65살이라고 한다. 아니, 이렇게 기쁠 수가! 그러나 찾아보니 유엔의 공식 기록물 출처가 아니다. 최초의 뉴스 유포자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다들 젊은층으로 귀속되고 싶어 하는 게 분명하다. 사실 젊음이란 건 상대적이다. 1985년생 남성이 경력도 없이 입사 면접에 가면 ‘나이가 너무 많다’고 혹평을 듣지만, 야당 대표로 뽑히면 ‘정치 새바람’이라며 젊음의 행보가 조명받는다. 얼마 전 티브이를 보니 어느 농촌 지역의 청년 회장님 연세는 67살이더라.
어찌 되었든 생일이 지난 후 국가가 인정한 청년의 연령대를 벗어나 세금 우대도 못 받는 처지에 이르렀다. 어디 세금뿐인가. 청년 임대주택, 일자리를 찾는 청년에게 제공되는 지원금, 청년 우대 대출은 물론이고 사회 초년생을 위한 각종 예금·보험도 가입할 수 없다. 심지어 서울시 내 청년 공간도 예약할 수 없다. 구청에서 운영하는 청년 공간 이용을 알아봤더니, “참가 인원 중 만 34살 이하 청년이 한명 이상 있어야 시설 이용이 가능하다”는 답을 들었다.
몇년 전 40대 선배가 해줬던 조언이 새삼 사무쳤다. “늘그니야, 40대가 되면 복지 혜택을 거의 받을 수 없어. 40대부터 65살까지는 진짜 혼자 버텨야 해. 더구나 1인 가구는 함께 고민할 배우자도 없잖아. 그러니 40대가 되기 전에 자립 여건을 마련해야 해. 제발 돈 좀 모아.” 티끌 모아 티끌이라며, 빵 사 먹고 만화책 사고 맛집 찾아다니는 나의 씀씀이를 걱정한 조언이었다. 선배가 조언할 때 정신 차리고 적금 좀 넣을걸. 난 영원히 청년일 줄 알았지 뭐야? 데헷!
청년이 아니게 된 몇달 사이에 자산 형편이 나아진 것도 아니지만 이제 청년 대상 임대주택도 신청할 수 없다. 1인 가구 청년일 때에는 공공임대주택의 ‘신혼부부’ 공급률만 높은 것이 불만이었는데, 신혼부부도 청년도 아닌 채로 어중간한 세대에 진입해버리고 만 것이다. 주거뿐 아니라 정부 복지 정책에서 40살부터 65살까지 중장년층은 소외되어 있다. 그러니까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국가가 가여워해주는 청년 시기에 자립하도록 돕는 게 정책 기조인 셈이다. ‘왜 젊은이만 지원해주냐! 중년층도 힘들다!’고 세대 갈등에 불 지피고 싶은 생각은 없다. 복지는 옆 사람과 싸워서 뺏어야 할 밥그릇이 아니니까.
빈곤도 그렇다. 누가 누가 더 가난한지, 인증하고 경쟁해야만 하는 시스템이 이상한 거다. 왜 청년과 중년이 하나의 일자리와 집을 두고 싸워야 할까. 복지의 사각지대는 청년층에도, 중년층에도 존재한다. 어쨌든 국가의 도움을 받으려면 가난을 입증해야 한다. 실제로 극한의 상황에 있음에도 서류로 그것을 증명할 수 없다면 청년도 수혜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중년도 마찬가지다. 40~50대라고 해서 모두 젊을 때 적절한 일자리에 정착해 자산을 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신체 건강해도 누구나 정상 궤도에 안착할 수 없는 경쟁 구조다. 그 궤도에서 한번 이탈되면 중년은 나이 때문에 기회나 보상을 박탈당하기 쉽다. 20대에는 실패를 극복할 시간과 체력이라도 있지만 50대에는 ‘내 탓’부터 하기 때문에 자책과 무기력이 깊어진다.
내가 일하는 직장에는 40~50대에 좌절을 겪고 길에서 생활하다 사회 복귀를 준비하는 이들이 있다. 얼마 전 무릎 수술을 해서 일을 쉬어야 했던 한 선생님 역시 혼자 있으면 나쁜 생각이 든다고 했다. “내가 왜 이 나이 먹도록 이러고 있나” 싶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괴감에 빠지면 남과 비교부터 한다. 그 비교 대상은 주로 준거집단의 평범한 삶이다. 50대에는 안정적인 기반 위에서 자녀와 함께 노후를 준비하는 것이 정상이라 여겨지고 거기 들어가지 못한 나는 부외자처럼 여겨진다. 청년은 세상 탓이라도 하지만, 40~50대는 현재의 책임이 오롯이 자기에게 있다고 강요받기 때문에 자책감만 커진다. 자꾸 지난날의 잘못된 선택만 곱씹게 되고, 주위에서도 ‘저 모양으로 사는 건 게으르게 산 대가’라고 손가락질한다.
같은 세대 안에서도 불행 배틀은 일어난다. 소셜미디어(SNS)에 “친구들은 공부에만 집중하는데, 우리 집은 가난해서 나는 아르바이트해야 한다”고 쓰면 바로 “그 정도로 가난하다고 하느냐. 당장 끼니 걱정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걸 도둑맞은 가난이라고 한다”고 훈계조의 댓글이 달린다. 짧은 글 안에 설명하지 못한 고통이 있을 텐데도 나의 힘듦을 인증해야만 공감을 받는다. 취약계층의 절대적인 가난 외에도 누구든 모진 환경에 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사회에 ‘파이를 더 주세요’라고 요구하면 ‘그건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는 소리나 듣는다.
요즘은 세대론을 논의할 때 밀레니얼 세대와 제트 세대가 주로 언급된다. 밀레니얼 세대의 기준 역시 저마다 다르다. 어느 신문사에서는 1982년생부터 밀레니얼이라고 하고, 한 20대 연구소는 1985년생부터라고 선을 긋는다. 1985년생부터 2002년생까지 밀레니얼이라 규정한다면 연령 차이가 10살 이상 나는데, 이들 사이의 공통점이란 1990년대 문화를 향유한다는 것 정도다. 자축인묘, 진사오미, 신유술해를 가늠할 때 “똘기 떵이 호치 새초미” 만화 <꾸러기 수비대> 주제가를 되뇐다고 동세대라 할 수 있을까.
1990년대생은 누구인가를 분석하는 기획 기사에 참여해 말을 보태는 90년대생들은 입을 모아 ‘90년대생을 하나로 정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90년대생은 공정에 민감하고, 워라밸을 중시하며 직장 내 성공보다 개인 브랜딩에 관심이 많고 소셜미디어와 커뮤니티에서 세대와 젠더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한다고 분석하지만 과연 그럴까 싶다. 같은 연도에 태어났어도 지금은 격차 사회다. 미디어가 송출하는 신호들(유행가, 예능 등)에 동일한 추억을 가질 순 있지만 지역, 계층, 성장 환경에 따라 압도적인 경험과 생각의 차이가 생긴다. 예전에는 88만원 세대, 삼포 세대라며 연민하더니 이제는 트렌디하게 주류 갈등을 주도한다며 밀레니얼&제트 세대라 부르는 건 누구를 위해서일까.
청년이든 밀레니얼이든 제트이든, 뭐라 불러도 그만이다. 미래가 불안하고 생존이 어려운 건 예나 지금이나, 누구든 피장파장이다. 개개인은 대단히 분투 중이다. 1982년생인 내 친구는 10년간 해오던 일을 코로나19 때문에 그만두고, 배달 일을 시작했다. 음악 전공자인 1995년생 친구는 교습 일자리가 전부 끊겨 아르바이트를 찾고 있는데 일자리가 너무 없단다. 개업하는 카페에 면접을 보러 갔더니 한명 뽑는 자리에 지원자가 줄을 서 있었다고 한다. 영화관, 화장품 가게,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친구들 모두 직장을 잃거나, 세명이 하던 일을 혼자 한다. 수익이 줄면 인건비부터 줄이는 게 자영업자의 사정이다.
미디어는 이런 개인의 사례는 소박한 에피소드로 취급하면서 소비자, 유권자로서 밀레니얼만 강조한다. 그 과정에서 청년도 중년도, 모두 작은 파이 하나, 밥그릇 하나를 가지고 다투도록 갈등만 조장된다. 남이 불행해야 내가 행복한 것도 아니고 남을 짓밟고 파이를 빼앗아야 내 상황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당신은 더 이상 청년이 아닙니다’라는 탈락 목걸이를 받고, ‘난 아직 힘든데 왜 청년만 혜택이 많아?’라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남이 가진 것에 불만부터 가지는 내가 끔찍하게 여겨졌다. 정신 차리자, 어른이 되자, 난 여전히 마음만큼은 여린 젊은이인걸?이라고 위로해봤자 괴물이 될 뿐이다. 내가 나를 단단히 붙들고 싶어서 길게도 주절거려봤다.
늘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