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프랭크 게리. 1929년생으로 1989년에 건축계의 오스카인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거장이다. AP 연합뉴스
나는 프랭크 게리를 싫어한다. 맞다. 그는 건축계의 가장 거대한 슈퍼스타다. 가장 유명한 건물은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이다.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티타늄 갑옷을 입은 이 미술관의 위용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은박지를 구겨서 바닥에 던진 다음 그 곡선을 토대로 쌓아 올린 것 같은 이 건물은 철저한 과시용이다. 많은 현대 건축물들은 대개 ‘나를 좀 보세요’라고 완곡하게 말을 건다. 빌바오 구겐하임은 ‘니가 나를 보지 않고 지나칠 수 있겠어?’라고 호통을 친다. 당신이 빌바오 주민이라면 이 건물은 축복이거나 고통일 것이다. 너무나도 자기주장이 강한 건물이기 때문에 당신은 강력한 존재감을 무시할 도리가 없다. 그런데 그건 좋은 건축인가?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 박미향 기자 mh@hani.co.kr
건축이 인간의 심미안을 만족시키고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한국의 전설적인 건축가 김중업의 걸작으로부터 배웠다. 나는 ‘맞춤법 검사기’로 가장 유명한 부산대학교를 나왔다. 딱히 눈에 띄는 건물이 없는 캠퍼스에서 언제나 오롯했던 건 인문관이었다. 언덕을 타고 흐르게 설계된 이 하얀색 건물은 특히 꺾어지는 곡선이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다. 나는 학교를 여러 해 다닌 후에야 이 건물이 삼일빌딩을 만든 한국 현대건축의 아버지 김중업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유리 파사드에 둘러싸인 중앙 계단은 빛이 쏟아지는 날 강의실을 찾아 걷는 것만으로도 황홀했다. 2014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이 건물에는 가이드 투어도 있다. 부산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분들이라면 꼭 가보시기를 권한다.
우리는 서울에 김중업의 위대한 랜드마크를 가질 기회를 놓친 적이 있다. 너무 바른 소리들을 해댄 탓에 유신 정권의 탄압을 받아 외국 생활을 했던 김중업은 박정희가 사망하자마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984년 예술의전당 지명 현상 설계에 참여했다. 건축적으로는 다소 삭막했던 80년대 서울에서 역사에 남을 랜드마크를 지을 수 있는 기회였다. 김중업과 동세대에 활동한 라이벌 건축가 김수근도 현상 설계에 참여했다. 그런데 당선작은 김중업과 김수근 아래서 사사했던 후배 건축가 김석철의 다소 평범한 작품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김중업은 억울하게 낙선됐다는 생각에 충격을 받아 쓰러진다. 그는 사경을 헤매다가 회복했지만 1988년에 작고했다.
나는 예술의전당의 최초 설계안들을 가끔 들여다본다. 개인적인 미감으로 판단하자면 김중업과 김수근의 설계안이 김석철의 것보다 확실히 더 아름답다. 김수근의 안은 옆으로 넓게 퍼진 수평의 건물들이 마치 파도처럼 우면산으로 이어진다. 김중업의 안은 지붕의 곡선이 놀랄 만큼 담대하다. 나는 김중업의 설계안이 당선됐더라면 어땠을까를 종종 상상한다. 하지만 설계안이 당선됐더라도 김중업의 마지막 삶은 그리 편안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석철의 안으로 건설된 예술의전당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 예술의전당에서 가장 특징적인 건물은 한국의 ‘갓’을 형상화했다는 오페라하우스와, 위에서 내려다보면 ‘부채’처럼 보이는 음악당이다. 그런데 두 건물은 김석철의 첫 설계안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도대체 어떻게?
우리는 예술의전당이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하에 진행된 프로젝트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군사 정권 집권하에 있던 국가들의 대규모 건축 프로젝트는 대개 권력자의 취향 안에 머무른다. 그리고 그들의 취향은 국가주의, 민족주의와 관계가 깊다. 어떻게든 ‘전통’이라는 것을 건축에 덧씌워야 정권의 역사적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석철 역시 설계안을 변경하라는 압력에 시달렸다. 결국 그는 여러 번 설계안을 고친 후 한국의 갓을 쏙 빼닮은 오페라하우스를 제시했다. 정권은 “국가적 상징성이 부족했는데 이제는 됐다”는 말과 함께 최종 승인을 했다. 덕분에 우리는 누가 보아도 노골적일 정도로 한국의 갓을 상징화한, 촌스러울 정도로 직설적으로 ‘이것이 한국이다!’라고 소리를 지르는 건물을 갖게 됐다.
1978년 개관 당시의 세종문화회관. 한겨레 자료사진
서울시는 얼마 전 광화문의 세종문화회관을 재건축해 ‘세계적인 랜드마크’로 만드는 10년 계획을 검토 중이라고 발표했다. 반대가 쏟아졌지만 찬성하는 의견도 있다. 꽤 많은 사람들은 이 건물이 보행자들의 동선을 막아세우는 육중하고 뻣뻣한 콘크리트 덩어리라고 불평한다. 사실 더 나빠질 수도 있었다. 이미 설계가 확정된 뒤 박정희는 갑자기 “지붕에 기와를 얹으라”고 지시했다. 세종문화회관의 건축가 엄덕문은 이를 거절했다. 그는 “기와를 씌우지 않고도 전통을 살릴 수 있으니 맡겨달라”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그는 군사 정권의 민족주의적 미학으로부터 완전히 탈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타협의 결과로 만들어진 세종문화회관은 이를테면 ‘권위’의 건물이다. 그건 현대 도시의 건물보다는 오히려 아테네의 언덕에 육중하게 자리 잡은 파르테논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이제 다시 프랭크 게리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1929년생인 그는 이미 1989년에 건축계의 오스카인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거장이다. 그러나 진정한 전성기는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의 완성과 함께 찾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역의 중심 도시인 빌바오는 몰락하던 공업 도시다. 바스크 정부는 생기를 잃어가는 도시를 살리기 위해 문화를 이식하기로 했다. 그 중심에 있는 프로젝트가 구겐하임 미술관이었다. 1997년 미술관이 건설되자마자 빌바오는 해마다 1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됐다. 사람들은 오로지 프랭크 게리의 건물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대규모 문화시설 건축을 통해 도시를 재생시키는 것을 ‘빌바오 효과’라고 일컫게 된 것이다.
빌바오는 전통이 골목마다 살아 있는 전형적인 스페인 도시다. 이런 도시의 한가운데 금박지를 구겨 놓은 것 같은 현대 건물을 꽂아 넣는 것은 미학적 선택이기도 하지만 정치적 선택이기도 하다. 건설이 확정되자 난리가 났다. 빌바오 시민의 95%가 건설을 반대했다. 지역 언론은 프랭크 게리의 설계안이 도시의 역사성을 파괴할 것이며 엄청난 적자를 안겨줄 거라며 격렬하게 빌바오시를 때려댔다. 빌바오시는 개의치 않고 건설을 강행했다. 대규모 공공 건축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해서 때로는 여론을 역행하는 모험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그 증거로 모두가 싫어하는 (혹은 싫어하는 척하는) 건물을 예로 들 참이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다.
서울도 ‘위대한 랜드마크’ 가질 뻔
정부 요구에 뻔한 예술의전당으로
하디드의 DDP는 괜찮은 불협화음
‘티타늄 재질’ 세종문화화관 어떨까
전통과 해체의 공존을 상상해본다
2014년 완공된 디디피는 유기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한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유작이다. 사람들은 좀처럼 이 건물을 좋아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잘 꺼내지 못한다. 세빛섬과 함께 전시행정의 대표적인 사례로 끝없이 비판을 받는 탓이다. 서울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건물이라는 미학적 비판도 여전하다. 나는 동대문 운동장이 있던 시절의 동대문을 기억한다. 그 경기장은 노후화된 탓에 주차장이나 풍물시장으로 활용됐다. 그저 그 건물이 거기에 오랫동안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도시의 유산이 되는 건 아니다. 사람들은 디디피가 동대문의 역사성을 무시한 건물이라고 말하지만 그렇다면 파리 한가운데의 퐁피두 센터는 역사성을 간직한 건물인가?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은? 바르셀로나의 고풍스러운 풍광 속에 빛나는 오이처럼 솟아 있는 아그바르 타워는?
공중에서 본 디디피의 전체 야경. 디디피 제공
게다가 많은 오해에도 불구하고 디디피는 지속적으로 어느 정도 흑자를 기록해왔다. 천문학적인 건축 비용을 단번에 뽑을 정도는 아니지만 재정적인 실패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디디피에 대한 평가는 해가 갈수록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지금 정부 역시 2020년 광복절 경축식을 디디피에서 열며 “디디피는 경성 운동장, 서울 운동장, 동대문 운동장을 거쳐 오는 동안 역사적 의미와 미래지향적 이미지를 함께 지닌 상징적 장소”라고 말한 바 있다. 많은 비판에도 디디피는 이미 서울의 역사가 됐다. 어울리지 않는 것을 마구잡이로 욱여넣으며 제멋대로 성장해온 도시 서울에 디디피는 꽤 어울리는 불협화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는 세종문화회관을 지나갈 때마다 프랭크 게리의 번쩍이는 티타늄 궁전이 들어서는 광경을 상상해본다. 경복궁의 한국적인 곡선과 해체주의적 현대 건축의 곡선이 요란하게 부딪히는 풍경을 떠올린다. 물론 이 글의 첫머리에 말했듯이 나는 프랭크 게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나의 건축 취향은 그렇게 해체주의적으로 번드르르하지 않다. 그가 만약 세종문화회관을 새로 짓는다면 그 건물은 서울에서 가장 미움받는 랜드마크가 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당신은 에펠탑이 파리를 망쳤다고 짜증을 내면서도 “파리에서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장소는 여기뿐”이라며 에펠탑에 있는 음식점에서 식사를 했던 프랑스 문호 모파상의 심정을 마침내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서울은 좀 더 대담하게 망쳐도 좋은 도시다.
▶ 영화 잡지 <씨네21> 기자, 패션 잡지 <긱 매거진> 피처 디렉터, <허프포스트 코리아> 편집장을 했다. 17년간 써온 글 중 아끼는 것을 모아 2019년 첫 에세이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냈다. 사람·영화·도시·옷·물건·정치까지 관심 닿지 않는 곳이 드물다. 품격과 허영, 쓸모 있음과 없음, 옳음과 현실 사이 세심한 눈길로 읽어낸 인물평을 3주마다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