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병원에 진료기록 요청때
민사소송법 본인 동의조항 없어
의료법에만 “동의”…잘 안 지켜져
민사소송법 본인 동의조항 없어
의료법에만 “동의”…잘 안 지켜져
교통사고 후유증 문제로 보험사와 재판을 벌이고 있는 권아무개(61)씨는 뒤늦게 자신의 진료기록이 본인 허락도 없이 보험사에 전해진 사실을 알게 됐다. 보험사는 권씨가 앓고 있는 증상이 사고 때문이 아니라 이전부터 앓던 병 탓이라며 치료비를 못 주겠다고 소송을 냈다. 그리고 권씨의 의료기록을 증거물로 요구했다. 권씨는 이를 거절했는데, 병원 쪽이 진료기록을 법원에 냈던 것이다. 권씨는 병원 쪽에 항의하다가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병원 쪽은 법원의 요구로 진료기록을 내게 됐다는 것이다. 권씨는 환자 허락없이 의료기록을 넘긴 병원을 검찰에 고소했고, 검찰은 병원에 ‘의료법 위반’혐의로 100만원의 벌금을 물렸다. 그러자 병원도 법원 요구에 따라 진료기록을 낸 것이니 정식 재판으로 시비를 가리겠다고 나섰다. 이처럼 법률 미비로 환자들의 의료정보가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새나가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에 대해 법원 쪽은 아직 뾰족한 대책을 내놓고 있지 않다. 현행 의료법 20조는 “본인의 동의가 없으면 개인의 진료기록을 다른 사람에게 내주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경우 법원은 민사소송법에 따라 병원에 의료기록을 내도록 ‘문서송부촉탁’을 할 수 있다. 문제는 법원이 보험사가 요청하면 관행적으로 병원에 교통사고 피해자의 진료기록을 제출하라고 하는데, 근거가 되는 민사소송법 318조에는 본인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없다는 점이다. 법원은 “진료기록 제출 여부는 병원이 법률을 따져 판단할 문제”라는 입장이다. 의료전담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 신수길 부장판사는 6일 “법원의 요청은 법적 강제력이 있는 게 아니어서 병원이 의료법 위반 여부를 따져 거부할 수 있다”며 “법원 요청이 있어도 개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의료기록을 제출하면 의료법에 저촉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법원의 의료기록 요청 사실을 개인에게 알리는 것은 현행 법률상 법원의 임무는 아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병원은 법원의 요청을 강제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경희의료원 윤태선 법무팀장은 “판사가 달라는 기록을 어떻게 주지 않을 수 있겠냐, (요청이 오면) 대부분 제출한다”며 “개인에게 따로 통보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의료소송을 주로 맡는 김상영 변호사는 “병원이 의료기록을 낼 때 개인 의사를 묻지 않는 것은 개인 정보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는 병원이나 법원 한 쪽의 책임이 아니라 법률의 미비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신 부장판사는 “대부분 개인들이 자신의 의료기록이 제출되는지 모르는 현실을 감안할 때 법률을 보완하거나 재판 과정에서 본인 의사를 물을 수 있는 절차가 있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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