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훈 전 대법관이 11일 별세했다. 향년 75세. 이 전 대법관은 탁월한 재판능력과 인자한 성품으로 선·후배들의 신망을 받았다. ‘법원 내 재야인사’로 불린 그는 30여년간 ‘정통 법관’으로 근무하며 개혁적·진보적 소수 의견을 소신 있게 밝혀 국민의 기본권 보호에 앞장섰다.
전북 고창 출신인 이 전 대법관은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그는 대학 시절 고등학교 동기인 손학규 전 바른미래당 대표와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고 조영래 변호사와 막역히 지냈다. 5·16 쿠데타로 군사정부가 들어서고, 유신헌법 제정을 앞둔 암울한 시기였던 만큼 사회문제를 놓고 토론하고 뜻을 함께하기도 했다.
1972년 제14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사법연수원 4기로 1977년 서울지법 영등포지원 판사로 임관했다. 서울고법 부장판사와 법원도서관장, 제주지법원장과 서울중앙지법원장을 거쳐 2006년 대법관에 올랐다. 그는 재직 당시 ‘법원 내 재야인사’로 불릴 만큼 개혁적인 인물로 평가받으며, 국민의 기본권 보호와 사회적 약자 옹호, 사법 정의에 중점을 둔 개혁적인 판결을 많이 내렸다. ‘이적표현물 제작배포의 처벌과 관련한 국가보안법 조항은 국가의 존립과 안전을 위태롭게 하거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줄 명백한 위험이 있을 경우에만 적용해야 한다’며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 판결, ‘무급휴직원을 내고 출산을 했더라도 근로기준법상 출산휴가 2개월간의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면서 근로자의 기본권을 보호한 판결, ‘공익을 위해 언론사에 내부 비리를 폭로한 공무원을 국가가 해임한 것은 부당하다’고 한 판결 등이 대표적이다.
대법관으로 임명된 뒤에도 국민 권익 보호를 위한 판결을 많이 내렸다. ‘4대강 사업 집행정지 신청’ 대법원 전원합의체 사건에서 그는 “환경문제가 포함된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미래의 세대인 우리 자손의 중요한 삶의 터전이 될 환경이 오염되거나 훼손되지 아니하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며 4대강 사업 중단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 의견은 아직도 법조계에서 회자될 정도로 유명하다. 그는 또 ‘배심원단이 일치된 의견으로 무죄 평결을 한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배심원단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려 ‘국민참여재판’ 정착에 공헌했고, ‘파업을 당연히 업무방해죄로 봐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남겨 노동자 보호에 앞장섰다.
참여정부 시절 대법관으로 임명된 그는 진보적 소수 의견을 많이 냈던 전수안·김지형·김영란·박시환 전 대법관과 함께 ‘독수리 5형제’로 불리기도 했다. 대법관으로 임명되기 전인 지난 2005년에는 이용훈 당시 정부공직자윤리위원장, 조준희 언론중재위원장과 함께 최종영 당시 대법원장 후임 최종 3인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2011년 대법관 퇴임 후에는 한양대 로스쿨 석좌 교수와 법조윤리협의회 위원장, 화우공익재단 이사장, 신문윤리위원회 위원장, 서울대 이사장 등을 맡으며 후학양성에 힘썼다. 지난 2018년에는 김명수 대법원장이 사법개혁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설치한 ‘국민과 함께하는 사법발전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맡는 등 최근까지도 법조계 원로로서 활동했다.
이 전 대법관과 함께 일했던 박시환 전 대법관은 “이 전 대법관은 성품이 너그럽고 주변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게끔 늘 부드럽고 인자하셨다”며 “진보적이면서도 보수적인 분들과 날을 세우지 않았고, 원칙을 지키며 중심을 잘 잡아주셨다”고 회고했다. 이어 “선·후배들로부터 신망이 두텁다 보니 퇴직 후에도 법조계 발전을 위해 다양한 역할을 맡으며 헌신하셨다”고 덧붙였다.
이 전 대법관은 4년 전 담도암 판정을 받았다. 낙향해 아내, 희귀병을 지닌 딸과 함께 힘겹게 정원을 일구며 삶을 정리하는 모습이 올해 어버이날을 앞두고 ‘아버지의 정원’이라는 다큐멘터리로 방영돼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빈소는 분당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2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오는 13일이고, 장지는 전북 고창이다. 손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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