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외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 국적 아동의 이름을 국내 여권에 영문(로마자)으로 쓸 때 현지 방식으로 표기할 수 있다는 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영문 여권 변경신청을 거부한 외교부에 대해 법원이 거부 처분을 취소하고 이를 허용해 주도록 판결한 첫 사례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1부(재판장 강우찬)는 ㄱ군(7)이 외교부 장관을 상대로 낸 여권 영문 성명 변경 거부처분 취소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31일 밝혔다.
2014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현재 벨기에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는 ㄱ군의 부모는 프랑스에서 출생 신고를 할 때 한글 이름과 현지 이름을 나열해 영문으로 표기했다. 당시 ㄱ군의 부모는 프랑스어 문화권에서 한글 이름을 부를 때 발음이 잘되지 않는 묵음인 H를 빼고 출생신고를 했다. 이후 ㄱ군 부모는 같은 이름으로 한국 여권을 신청했으나 여권 발급업무를 대행한 서울 종로구청은 로마자표기법에 어긋난다며 기존 이름과 로마자표기법에 맞는 이름을 나열한 여권을 발급했다. H를 넣은 이름으로 여권을 발급해 준 것이다. 이에 ㄱ군 부모는 기존 이름으로 변경해달라고 신청했으나 거부당하자 소송을 냈다.
ㄱ군 부모는 법정에서 “H가 묵음이어서 불어 문화권에서 생활하기엔 기존 이름이 더 적합한 로마자 음역이라고 판단했다”며 “여권과 현지 이름이 달라 초등학교 진학 등 생활에 큰 불편과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2011년 개정된 여권법은 옛 여권법과 달리 취업, 유학 등의 이유로 국외에 살면서 여권에 적힌 영문 이름과 다른 영문 이름을 ‘장기간’ 사용한 경우 여권 영문 이름을 고치거나 바꿀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외교부는 재판에서 가족관계등록부에 적힌 법적 이름을 음역에 맞게 표기해야 하고, 여권 영문 이름 변경은 여권의 대외 신뢰도 등을 위해 신중히 해야 한다고 맞섰다.
재판부는 “ㄱ군처럼 국외에서 출생해 성장한 아동의 경우 나이가 어려 유학 기간이 짧더라도 이미 출생 후 입학 전까지 수년간 국외 사회공동체 생활에서 해당 이름으로 불리며 다방면으로 관계를 맺었을 것이므로, 성인이나 유학 기간이 긴 청소년 등과 달리 취급할 이유가 없다”며 ㄱ군 부모 쪽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유엔 아동 인권 협약 등을 근거로 단순한 국가의 위신이나 추상적인 공익만을 들어 정당한 요구를 거부할 수 없다고도 판단했다. 재판부는 “우리나라가 가입한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에 의하면 행정당국 등이 실시하는 아동에 관한 모든 활동에 있어 아동의 최선의 이익이 최우선으로 고려돼야 한다”며 “ㄱ군이 태어나 지금까지 평생 불리고 쓰던 이름을 계속 쓸 수 없게 된다면 사회생활상 불편과 어려움을 겪게 될 뿐 아니라 정신적 혼란을 겪는 것이 불가피해 보인다”고 짚었다. 이어 “그동안 경직돼 있던 여권법 규정에 따른 불이익이 결코 특별한 보호의 대상인 아동에게 돌아가게 방치해선 안 된다”고 덧붙였다.
조윤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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