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부천희망재단 정인조 이사장
“10년 뒤에는 팔순 기념으로 서울에서 신의주까지 500㎞를 걸어서 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난 9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정인조 부천희망재단 이사장이 밝은 표정으로 얘기했다. 지난 8월19일~9월5일 총 18일 동안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에서 경남 합천까지 500㎞ 이상 걸었던 피곤함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그의 표정에서는 ‘기부 목표’를 달성했다는 뿌듯함이 묻어나온다.
정 이사장은 ‘70 감사, 고향사랑 평화기원 걸어서 고향까지 500㎞’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이 도보행진을 통해 1㎞에 100만원 꼴로 총 5억원 기부를 약속했다.
칠순 기념 임진각~합천 고향까지 500㎞
지난 5일까지 18일간 ‘평화기원’ 도보행진
1㎞에 100만원꼴 모두 5억원 기부 약정 검사·감리업체 창업해 20억 나눔 실천
“분단이 최대 모순” 쉰살 때부터 통일운동
“꿈 이루도록 남북 화해협력 계속 앞장”
올해 고희를 맞은 정 이사장은 이번 도보행진을 통해 오래 간직해온 버킷 리스트 하나를 이루었다. “걸어서 고향에 가겠다”는 목표가 그것이다. 1971년 서울대 금속공학과에 합격한 뒤 인천과 부천 등 수도권에서 50년 동안 살아온 그가 약 30년 전부터 가슴 속에 품은 목표였다.
그는 명절을 포함해 1년에 4~5차례 고향을 방문하고 있지만 걸어서 간다는 것은 의미가 매우 다르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하루 약 4만5000보 30여 ㎞를 걷는 18일의 강행군 동안 그의 머릿 속에는 오롯이 ‘고향’이 자리하고 있었다. 소먹이며 꼴 베던 어린 시절부터, 가난 속에서도 사랑으로 자식들을 키워주신 부모님, 그리고 인심 좋은 고향 사람들…. 고희의 나이,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오락가락하는 장마철 빗줄기 등은 오히려 그의 ‘고향 사랑’을 담금질해줬다.
이번 행진은 또 나눔을 실천해온 정 이사장의 의지를 한층 다지는 계기가 됐다. 중공업과 정유업체 근무를 거쳐 2001년부터 정유·석유화학·발전 등 기간 산업의 공장 신설과 설비의 품질과 안전성을 점검하는 검사·감리업체인 ‘글로벌21’(주)를 창업 운영해온 그는 일상적으로 기부를 꾸준히 해왔다. 그가 보관하고 있는 연말 기부금 영수증만 보더라도, 지난 1995년부터 지난해까지 합산 기부금액이 얼추 20억원에 이른다. 이번 5억원 약정을 통해 그는 “유산을 포함해 30억원을 기부하겠다”는 목표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사실 그는 “이번 행사에서는 ‘기부자’보다는 ‘모금활동가’의 자리에 서 있었다.” 기부자는 개인적으로 나눔을 실천한다면, 모금활동가는 우리 사회에 기부문화를 전파하는 사람이다. 이런 변화는 그가 2011년 부천희망재단 출범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가 2014년부터 이사장을 맡으면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부천지역의 기부문화 확산을 통해 어려운 상황에 처한 주민을 돕는 것을 목표로 한 희망재단을 책임지게 되면서 솔선수범을 넘어서 기부 권유도 계속 해왔기 때문이다. 그런 덕분에 이번 행진은 정 이사장 개인 행사를 넘어선 ‘하나의 축제’가 되었다.
“이번 걷기행진 때는 단 1㎞도 혼자서 걸었던 적이 없어요. 평화마라토너 강명구씨를 비롯해, 조헌정 향린교회 전 담임목사, 김기석 성공회대 총장,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대표, 김창진 크라스키노포럼 공동대표, 황광석 희망래일 사무총장, 김필수 동북아평화연대 공동대표, 문준희 합천군수, 김기태 민주평통합천군협의회장 등 200명 가까운 명사들이 기꺼이 행진에 동참해줬거든요.”
무엇보다 정 이사장은 이번 행진을 계기로 새로운 10년의 꿈을 갖게 됐다. 바로 “휴전선을 넘고 개성과 평양을 거쳐 신의주까지 걸어가는 꿈”이다.
그는 평소 “세상 사람들은 돌아갈 고향이 있는 사람과 고향이 없는 사람으로 나뉜다”고 자주 말한다. 처음에는 고향 합천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시작한 말이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보니 어쩌면 우리는 민족 전체가 고향을 잃은 사람들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그가 합천을 떠올릴 때면 느끼게 되는 인간적인 정과 푸근함 등의 좋은 감정을 남과 북 사이에서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렇게 형제를 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은 모두 고향을 잃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또 진보적인 기독교장로회 소속 교회의 장로인 그는 “예수의 기본정신이 사랑과 평화인데 분단 상황은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그는 이번 행진의 목표에서도 ‘고향사랑’과 함께 ‘평화기원’을 나란히 제시했다.
“분단이 우리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모순”이라는 그의 생각은 그를 50살 이후 통일운동으로 이끌었다. 현재 그는 민주평통부천시협의회 회장을 3연임하고 있으며, 남북 철도를 잇고자 하는 ‘동해북부선연결추진위원회’ 공동대표도 맡고 있다.
그는 앞으로 10년 동안 민족의 평화와 화해를 지향하는 활동을 꾸준히 펼쳐나갈 계획이다. “이번에 행진을 준비할 때도 정확한 길을 찾기 위한 도상훈련만 1년 가까이 했어요. 민족의 고향을 찾는 ‘신의주 도보행진’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시민사회가 앞장서 남북 화해협력을 위한 평화운동을 중단 없이 지속적으로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 이사장이 과연 꿈을 이룰 수 있을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만약 실제로 걸어서 신의주까지 가게 되다면 그것은 개인과 지역을 넘는 민족적 축제가 될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김보근 선임기자 tree21@hani.co.kr
지난 9일 서울 나들이길에 만난 정인조 부천희망재단 이사장이 30년 품었던 ‘걸어서 고향까지’ 버킷 리스트를 이룬 소감을 전하고 있다. 사진 김보근 기자
지난 5일까지 18일간 ‘평화기원’ 도보행진
1㎞에 100만원꼴 모두 5억원 기부 약정 검사·감리업체 창업해 20억 나눔 실천
“분단이 최대 모순” 쉰살 때부터 통일운동
“꿈 이루도록 남북 화해협력 계속 앞장”
지난달 19일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망향의 노래비 앞에서 출발한 정인조(앞줄 맨가운데) 이사장이 9월5일 고향 합천에 도착해 지역주민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합천군 제공
연재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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