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낮 서울 관악구 ‘해피인' 앞에서 한 주민이 도시락을 받기 위해 파란색 장바구니를 옆에 두고 인근 건물 계단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고시촌’으로 불리는 서울 관악구 대학동은 높이에 따라 다른 풍경을 볼 수 있다. 낮은 동네에서는 가방을 메거나, 책을 들고 다니는 20~30대 청년과 신축 원룸, 프랜차이즈 식당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언덕을 오를수록 오래된 원룸과 고시원, 식당, 그리고 50~60대 이상의 중년 남성들이 눈에 띈다.
대학동 언덕바지의 한 카페 앞 풍경도 그렇다. 소나기가 쏟아지던 지난달 31일 점심, 파란색 장바구니를 든 중년의 남성 네댓명이 카페 밖에 줄을 섰다. 자원봉사자들과 남성들이 밝은 표정으로 말을 주고받는다. “왜 지난주에 안 오셨어요?” “아니 내가 엊그제 왔는데 문을 닫았길래….” “제가 요일 바뀌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다음주에는 월, 화, 수에 오세요.” “웬수야 웬수, 시간 맞춰서 오라니까.” “원수를 사랑하라! 참새가 어찌 방앗간을 그냥 지나갑니까.”
천주교 사회복지 나눔 공동체인 ‘해피인’은 이 카페에서 매주 2~3일 점심 도시락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예전에는 급식을 했지만 코로나19 때문에 지난해부터 도시락으로 바꿨다. 해피인이 나눠준 파란색 장바구니에 도시락을 받아 가는 이가 한번에 100~120명쯤 되는데 대부분 40~60대의 남성이라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대학동에 거주하는 중년 남성이다. 이곳은 사법시험·행정고시 준비생들의 거주지였지만, 2017년 사법시험이 폐지된 뒤에 20~30대 고시생의 수가 크게 줄었다. 대신 사법시험 폐지에도 떠나지 못한 40대 이상의 ‘장수생’과 고시촌 특유의 저렴한 주거비·식비 때문에 새로 유입된 50대 이상의 중장년·노년층이 비어 있는 고시원과 소형 원룸을 채우고 있다. 이들 대부분 저소득층인데다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고립되는 경우가 많아 ‘해피인’ 같은 지역 단체들은 이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늘리고 있다.
지난 10일 대학동의 한 부동산 공인중개사는 <한겨레>에 “과거에는 고시원, 원룸 가릴 것 없이 20~30대가 많았는데, 2017년 무렵부터 고시원에 거주하는 50대 이상 중년이 많아졌다. 지금은 고시원에 거주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중년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2014~2020년 서울시 주민등록인구 통계를 살펴보면, 일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의 유입으로 대학동의 20대 인구는 6년 사이 854명 늘었다. 그러나 같은 기간 사법시험 주력층인 30대는 106명, 40대는 125명이 줄었다. 대학동 옛 고시촌 주거지역에 사는 것으로 추정되는 50~60대는 715명 증가했다.
해피인에서 받은 도시락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김아무개(67)씨도 몇년 전 대학동에 새로 유입된 ‘고시촌 중년’이다. 그는 10여년 전만 해도 안정적인 중견기업의 회계담당 직원이었다. 그러나 회사가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 결국 부도가 났고, 큰 빚을 떠안았다. 김씨는 아내와 이혼하고, 아들과 딸을 뒤로하고 집을 떠났다. 여동생의 집에 얹혀살기도 하고, 집을 구해준다는 사이비 종교의 꾐에 빠지기도 한 끝에 대학동 고시촌에 정착했다. “0.8평은 됐나? 간단한 짐만 갖고 왔는데도 방에 누울 자리가 없더라고. 그래서 다 쌓아놓고 짐 사이에 겨우 누웠어.” 네 가족과 번듯한 집에서 살던 김씨에게 고시원 생활은 처음엔 녹록지 않았다. 다행히도 김씨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임대주택에 당첨돼, 정부·구호단체의 지원을 받아 현재는 월세 8만원짜리 16.5㎡(5평) 원룸에 산다.
김씨 같은 이들이 대학동을 찾는 이유는 1인 가구가 살기에 저렴한 주거비 때문이다. 천주교 빈민사목위원회가 지난해 7~8월 한국도시연구소와 함께 105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대학동 고시촌 거주가구 실태 조사’(실태조사)를 보면, 보증금 없이 월세로 사는 이들이 68.6%였고, 평균 월세는 23만5천원으로 조사됐다. 대학동에 살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ㄱ(42)씨는 “혼자 살기 이렇게 좋은 데가 없다”며 “대학동, 신림동에는 학원도 있지만 학원보다도 저렴한 고시원이 있고 밥값도 싸다”고 말했다. “저처럼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아서 편하게 입고 다녀도 서로 이해할 수 있고 위화감이 없어요.” 대신 주거 환경이 열악하다. 관악구는 최저주거기준에 미달하거나 고시원 등 주택 이외 장소에서 살거나 지하·옥탑방에 거주하는 비율을 뜻하는 주거빈곤율(31.3%·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이 서울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문제는 이들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태에서 열악한 거주지에 살고, 주변과 소통하지 않아 고립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태조사를 보면 월평균 소득이 100만원 이하는 59.8%에 이르렀다. 이웃과 최대한 마주치지 않는다는 답변이 35.2%이고, 가족과 연락을 아예 안 한다는 답변도 20%나 됐다. 김씨도 가족과 연락이 끊어진 것은 물론, 대학동으로 오며 모든 지인, 친구들과도 연락이 끊어졌다고 한다. “내가 나이 들어서 이렇게 된 걸 알리고 싶지 않았어. 다들 어디 회사 임원 하면서 번듯하게 사는데….”
이들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며 지난 3월 천주교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는 ‘참 소중한…’ 센터를 해피인 바로 옆에 열었다. 센터는 대학동 중장년들이 언제든 방문해 커피와 라면을 먹을 수 있다. 탁구동호회, 사진동호회 등의 모임을 갖기도 한다. 고시촌 중년의 ‘사랑방’ 구실을 하고 있다.
김씨는 해피인과 센터에서 만난 이웃들과 ‘소행모’(작은 행복을 모으는 모임)를 하고 있다. 이들은 모바일 메신저 단체대화방에서 읽어보면 좋을 글을 나누기도 하고, 함께 등산을 간다. 동네 청소, 화분 만들기 등 지역 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을 할 때도 있다. 김씨는 “소행모에서 돈을 모아 해피인 도시락에 간식을 기부하기도 했다. 우리가 혜택과 도움을 받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물론 김씨 같은 이들은 소수다. 코로나19로 더 주변과 소통하지 않고 홀로 지내는 이들이 많다. 김씨는 스스로에 대한 다짐인지, 자신 같은 이들에게 건네는 조언인지 모를 말을 했다. “당장은 대학동을 떠날 수도 없고 떠나고 싶지도 않지만 최대한 건강하게 이웃들도 돌보고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돼야지.”
10일 낮 서울 관악구 ‘해피인'에서 주민들이 도시락을 받아 집으로 가고 있다. 이날 메뉴는 한우소고기국과 김치, 야채계란볶음, 멸치볶음이었다. 오지 못하는 이웃의 점심까지 챙겨가는 주민들도 심심치않게 있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채윤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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