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세웅 신부가 지난 30일 오후 서울 광화문에 있는 한 서예 공부방에서 붓글씨로 ‘정의’를 쓰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얘야, 글씨 좀 예쁘게 쓰거라.”
어머님의 말씀이 어제 일처럼 귀에 쟁쟁합니다. 어릴 적 숙제할 때나 지금이나 성질 급한 저는 글씨 또한 후다닥 썼습니다. 신부로서 본당 사목을 할 때, 여러 차례 붓글씨에 대한 권유가 있었으나 정작 붓을 잡지는 못했습니다.
2012년에 현장 사목에서 은퇴하고 제 나름의 시간표대로 생활하고 있을 때입니다. 또다시 권유를 받았지만, 선뜻 답을 못 했습니다. 그러다 자택에서 투병 중인 김홍일 전 국회의원을 위해 한 달에 한 번 방문하여 봉성체 기도를 올릴 때였습니다. 김 전 의원의 부인이 제게 붓글씨를 쓰냐고 물었습니다. 남편이 간직했던 귀한 문방사우를 제게 주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문방사우를 들고 돌아오는 길, 팔에 전해지는 묵직함은 일종의 암시나 의무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그분께 연락을 취했습니다. 저의 붓글씨 선생님인 이동천 박사 말입니다. 예전에 제가 한 번 거절했던 전력이 있었던지라 조심스럽게 청했는데, 고맙게도 이 박사는 흔쾌히 응해 주었습니다. 이동천 박사는 미술품 감정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서예 분야에서 더 출중한 분입니다.
학교 가는 마음으로 매주 토요일 아침 붓글씨를 배우러 갔습니다. 첫날, 저는 이 박사에게 예쁜 글씨를 쓰도록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박사는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예쁜 글씨라뇨? 저는 살아 있는 글씨를 원합니다. 글씨에 뼈와 근육이 있고 신경이 통해 생명력이 넘쳐야 합니다.”
취미 삼아 붓글씨 한번 배워볼까 했던 저는 마치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얼떨떨해하는 제게 이 박사는 “신부님, 글씨는 목숨 걸고 쓰는 겁니다”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이게 아닌데’ 싶었으나 발을 빼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그 뒤 강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신부님 있는 힘껏 쓰세요. 종이가 찢어질 정도로 온 힘을 다해 꾹꾹 눌러쓰셔야 합니다. 글씨 쓰실 때, ‘사각사각’ 봄누에가 뽕잎 갉아 먹는 소리가 나야 합니다.” 재미는커녕 점점 힘만 들고 손아귀가 아팠지만 시키는 대로 쓰고 또 썼습니다. 너무 꽉 잡은 나머지 글씨 쓰다가 붓대도 여러 개 부러뜨렸습니다. 저는 하기로 한 것은 매우 잘 지키는 사람입니다. ‘규칙대로 사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베네딕도 성인의 말씀을 새롭게 되새겼습니다. 물론 오기도 발동했지요.
제가 처음 쓴 글자는 제 이름 가운데 글자인 ‘세’(世) 자(사진)입니다. 그런데 이동천 박사가 묘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 자를 예서로 쓰면 땅 위에 세워진 3개의 십자가 형태라는 겁니다.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과 함께 내적 감흥, 영적 전율이 일었습니다. 섭리, 운명이란 단어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순간 ‘목숨 걸고’ 온 힘을 다해 썼습니다. 이 박사는 글씨를 보더니 “신부님, 살아 있는 글씨가 뭐냐고 하셨죠? 바로 이겁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비로소 붓글씨란 바로 흐트러짐 없이 전심전력해야 한다는 신학교의 교육, 온몸을 던지는 순교적 결단과 일치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박사는 제가 사제이니만큼 붓글씨로 성서 말씀을 쓰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제 생각도 같았습니다. 기도와 묵상을 할 때 주제어를 뽑곤 하는데 이를 ‘영적 꽃다발’이라고 합니다. 저희의 결심을 하느님께 바친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이 기회에 성경 말씀에 대한 성서적 해석을 새로이 하고 싶다는 생각도 가졌습니다.
성경 구절을 쓴 붓글씨 중에 ‘너 어디 있느냐’(사진)와 ‘심장을 찢어라’(사진)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너 어디 있느냐’는 창세기 3장의 말씀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부끄러워 숨자 하느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이 구절이 제 가슴에 깊이 박힌 것은 1977년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입니다. 마르틴 부버의 책을 읽고 있었는데 이런 내용이 나왔습니다. 마르틴 부버 역시 수옥 생활 중이었는데, 어느 날 그를 놀리고 싶었던 간수가 질문했습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셔서 아담과 하와가 숨은 곳을 다 아실 텐데 왜 ‘어디 있느냐’라고 물었냐는 겁니다. 간수에게 마르틴 부버가 대답합니다.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가 아니라 당신에게 묻고 계시다고.
내 마음의 등불 “암흑 속의 횃불”
지금도 하느님은 묻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에게 너 어디 있느냐고, 네가 있는 자리가 바른 자리냐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서의 실존적 해석입니다. 감옥 속에서 저도 ‘지금 이 자리가 내 자리인가’를 새삼 고뇌했던 기억이 납니다. 성서의 말씀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이렇게 날카로운 질문이 됩니다.
이 글씨를 쓸 때 종이가 찢기고 글씨가 비뚤어진 것 같아, 이 박사에게 다시 쓰고 싶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박사는 괜찮다고 하더군요. 선생님에겐 비뚤고 똑바르고가 아니라, 살아 있는 글씨와 죽은 글씨가 기준이었던 듯합니다. 저는 아직 그 경지의 발끝도 따라갈 수 없기에 늘 그렇듯이 다시 쓰라 하면 다시 쓰고, 됐다 하면 된 걸로 압니다.
“심장을 찢어라”는 구약성경 요엘서 2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2~3월은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은 뉘우침과 속죄의 날입니다. 그런데 어느 사순절에 이 구절이 제 마음을 울렸습니다. ‘사람아,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 회개하려면 ‘옷을 찢지 말고 심장을 찢어라.’ 성서의 심장은 존재론적 가치를 말합니다. 회개는 목숨을 건 결단이고 전 존재를 거는 일입니다. 적당히 뉘우쳐서는 안 될 일입니다. 성경의 말씀과 ‘붓글씨는 목숨을 걸고 써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이 공명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성경 말씀은 아니지만 제게 큰 의미가 있는 글씨는 ‘암흑 속의 횃불’(사진)입니다. 우린 참으로 암흑 같은 시절을 지나왔습니다.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나고 지학순 주교님이 구속되었습니다. 그 후 주교님은 석방되었지만, 우리의 석방 운동은 계속되었습니다. 청년 학생들이 끝없이 잡혀가 고초를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인물로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그때 유인물의 큰 제목이 ‘암흑 속의 횃불’이었습니다.
그해 11월 말부터 <동아일보> 광고 탄압이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연말에 연초의 신문을 미리 찍어두었습니다. 당시 신문은 총 8면이 발행되었는데 1975년 1월4일자 신문 8면에 전면광고로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과 사제단의 성명을 싣기로 했습니다. 암울했던 시절, 이 일을 추진했던 사람들조차도 과연 성사될 것인지 의문이었습니다. 1월4일에 전면광고가 나갈 거라고 하자 김수환 추기경조차 ‘어렵지 않을까’라고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신문은 나왔고 세상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신부들이 신문을 나눠서 각 성당에 뿌렸습니다. 그 뒤, ‘암흑 속의 횃불’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정신이자 실천 강령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2020년 10월, 그동안 쓴 붓글씨를 모아 윤형중(마태오) 신부 추모 전시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그 전시회의 제목을 ‘암흑 속의 횃불’로 정했습니다. 신념과 정의라는 칼날이 무뎌져서는 안 된다는 다짐이자 윤형중 신부에게 바치는 기도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전시회에 오신 수녀님 한 분이 뜻밖의 제안을 했습니다. “신부님의 글씨를 보면 울부짖음이 느껴져요. 저는 성경 말씀도 좋지만 신부님이 시대의 증언을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함세웅 신부가 지난 30일 오후 '정의'를 쓰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전시회가 끝나고도 수녀님의 말씀은 쉽게 잊히지 않았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온몸으로 시대와 부딪치며 살아온 세월이지만, 붓글씨로 시대정신을 표현한다는 생각은 못 해봤기 때문입니다. 공교롭게도 그 말씀을 하신 수녀님은 1974년 지학순 주교님의 양심선언을 타이핑한 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셨던 분입니다. 작은 퍼즐들이 맞춰져 하느님의 섭리라는 큰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 시편의 기도도 떠올랐습니다. 시편 기도에는 찬미 기도, 탄원, 감사, 왕을 위한 기도, 지혜, 전례, 율법의 기도와 함께 ‘역사 기도’가 나옵니다.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을 향하며 민족이 살아온 길을 회상하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문득 하느님 안에서 역사를 회상하면 아름다운 기도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사에 헌신했던 사람들을 기억하고, 과거를 현재화시켜 시대의 정신을 벼리기 위해 붓글씨로 ‘역사 기도’를 써보자는 결심이 섰습니다. 우리 민족이 걸어온 지난한 길을 한 글자 한 글자 옮기면서 나라와 겨레를 위해 기도합니다. 붓을 잡기 전에 늘 기도하지만, 이제는 붓글씨가 곧 기도이며 나아가 미래를 향한 길잡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선열들이여 이끌어 주소서. 아멘!
1968년 천주교 신부가 된 뒤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1974년)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2012년 현역 은퇴 뒤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한겨레> 누리집에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를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