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의 그룹 지배권 불법승계 의혹 사건 변호인들이 ‘사법농단’ 재판에 잇따라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이들은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 법원행정처에서 근무한 ‘엘리트 판사’ 출신들로, 사법농단 이후 법복을 벗고 대형로펌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들 중 일부는 사법농단에 깊숙이 관여해 대법원 징계를 받기도 했는데,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들의 행보를 두고 사법 부조리의 단면을 보여준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15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재판장 윤종섭) 심리로 열린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120번째 공판에는 심경 김앤장 변호사가 증인으로 출석했다. 심 변호사는 양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 인사심의관, 사법지원총괄심의관을 지낸 뒤 2017년 김앤장에 합류해, 현재 이 부회장과 함께 삼성바이오로직스(삼바) 회계부정 혐의로 재판을 받는 김태한 전 삼바 대표를 변호하고 있다.
심 변호사는 2015년 9월 이규진 당시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의 지시를 받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지방의원의 의원직 상실 여부 사건을 맡은 방창현 당시 전주지법 판사에게 심증을 묻고, 법원행정처의 의견을 알려주는 방식으로 일선 재판에 개입한 의혹을 받는다. 이 사건으로 방 판사는 공무상 기밀누설 혐의로 기소됐으나,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현재 항소심 진행 중이다. 이날 검찰은 심 변호사에게 그가 인사심의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법원 내부망(코트넷)에 한미 에프티에이(FTA) 반대 글을 올리는 등 사법행정에 부담을 준 판사들에게 법원행정처가 인사상 불이익을 준 것인지, 2015년 사법지원총괄심의관으로 일하는 동안 대법원 판례와 배치되는 하급심 판결이 선고되자 법원행정처가 대책문건을 만들어 하급심에 영향을 미치려 한 것은 아닌지 등을 신문했다.
지난 1일 같은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시진국 화우 변호사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 기획심의관을 지내면서 사법농단에 연루된 의혹을 받는 인물이다. 검찰은 이날 시 변호사가 2015년 법원행정처의 지시를 받아 법관들이 익명으로 사법부의 문제점을 지적해온 익명 카페를 와해하려 한 일 등에 대해 신문했다. 시 변호사는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으로 재직했던 2014년 11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 사건을 두고 ‘피해자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오면 국가적 부담이 된다’는 취지의 박근혜 정부의 입장을 담은 문건을 작성하는 등 특정 재판의 결론을 사전에 검토한 의혹도 받는다. 이 사건 등으로 시 변호사는 2019년 1월 감봉 3개월의 징계를 받았지만, 지난해 화우에 합류해 현재 이 부회장 등과 함께 기소된 최치훈·김신·이영호 전 삼성물산 사장단을 대리하고 있다.
이 밖에도 김현보 김앤장 변호사와 최창영 해광 변호사 등이 이 부회장과 삼성 미래전략실(미전실) 전 임원들을 변호하고 있다. 김 변호사는 법원행정처 윤리감사관을 지내면서 양승태 코트의 숙원사업인 ‘상고법원 도입’에 반대한 법관의 재산관계 등을 알아보라고 지시하는 등 법관을 사찰한 의혹을 받았고, 최 변호사는 2013년 임성근 당시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의 연락을 받은 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체포치상 사건’ 판결문을 수정한 전직 법관이다. 이날 임 전 차장 사건의 재판부는 검찰 신청에 따라 김현보 변호사를 증인으로 채택해 추후 신문하겠다고 밝혔다.
임성근 전 부산고법 부장판사의 탄핵심판에서 국회를 대리했던 양홍석 변호사(법무법인 이공)는 “법률상 이들의 변호사 업무에 대해 제한할 수는 없지만, 재판을 거래 수단으로 삼았던 법관 출신 법조인들의 승승장구는 우리 사회의 사법 부조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꼬집었다.
신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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