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15일(현지시각)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화상 정상회담에서 대만 문제 등에 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EPA 연합뉴스
미-중 대결의 열전 지대가 된 대만은 중국에 가장 늦게 편입된 영역이다. 대만이 공식적으로 청나라의 통치 아래 들어간 때는 명나라 잔존 세력인 ‘정성공의 난’을 완전히 진압한 1683년이다. 중국 동남 해안을 근거지로 난을 일으킨 정성공 세력이 대만으로 들어가자, 청의 진압군이 추격해서 복속시킨 것이다.
그때까지 대만은 중국에서는 변변한 명칭조차 부여하지 않던 땅이었다. 대만이 정성공 세력의 진입 등으로 중국과 세계사에 편입된 배경에는 15세기 이후 퍼진 서세동점의 조류가 있다. 명나라 초기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간 정화의 대원정이 갑자기 폐기되고, 해금령이 내려졌다.
이는 동아시아 해역을 무주공산으로 만들었다. 곧, 희망봉을 돌아서 아시아로 오는 해로를 개척한 포르투갈이 50년 만에 일본까지 찾아와서는 해상권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이 일본까지 오는 과정에서 대만을 발견해, 그들이 명명한 ‘포모사’라는 이름이 서방에서는 2차대전 전까지 통용됐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대만 연안에 식민지를 개척해 통치하다가 정성공 세력에 밀려났다.
정성공 세력은 명의 해금령 이후 무주공산이 된 동아시아 해역에서 활동하던 무국적 해상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송나라 이후 중국 경제의 중심지였던 동남 연안 지대 경제력의 상당 부분은 해상 교역이 근원이었다. 일본 왜구 등과 결합한 무국적 해상 세력이 밀수 등 비공식 해상 교역을 주도했다.
명나라 말기의 임진왜란은 유럽 세력과 교역으로 성장한 일본의 힘을 보여줬고, 왜구는 그 부산물이었다. 왜구로 상징되는 무국적 해상 세력들의 정점이 정성공의 난이다. 정성공의 어머니가 일본인이고, 그가 일본에서 성장한 것은 이 세력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후 중국의 지정학적 과제는 △한족이 사는 중원의 통일과 안정 △고대 이후 중원의 안보를 위협하던 세력이 있던 신장, 몽골, 만주, 티베트 등 서북 변경 지대의 완충화에 더해 △동남 해안 지역의 방역이 추가됐다. 이 동남 해안 지대의 방역은 시간이 갈수록 중국에는 가장 사활적인 지정학적 과제가 됐고, 대만은 그 중심지로 부상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며 중국의 반식민지화를 완성하고 최우선으로 대만을 할양받았다.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의 승기를 만든 미드웨이 해전을 지휘한 체스터 니미츠 제독 등 해군 지도부는 태평양에 산재한 일본 군사력을 우회하는 ‘섬 건너뛰기 전략’을 채택해, 오키나와까지 진격하자고 주장했다. 이들은 오키나와에서부터 본격화할 일본 본토 공격의 배후지로 대만을 선택했다. 반면 더글러스 맥아더의 육군은 일본 군사력에 맞서면서 북상해 필리핀을 점령하자고 고집했다. 극동사령부가 있던 필리핀에서 일본에 패퇴당해 오스트레일리아까지 후퇴했던 맥아더에게 필리핀 회복은 그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맥아더가 지휘권을 장악하면서, 대만에 미군이 진주하지 않게 됐다.
역사는 반복됐다. 정성공 세력에 이어 중국 본토에서 벌어진 국공 내전에서 패한 국민당 세력은 대만으로 퇴각했다. 당시 대만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면, 그 이후 동아시아 분쟁은 더욱 복잡하게 격화됐을 것이다. 한국전쟁 때 중국군에 밀려난 맥아더는 만주 폭격과 함께 대만의 국부군을 동원해 중국 동남 해안을 침공하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한국전쟁 뒤 1954년 미국과 대만이 공동방위조약을 논의하자, 그 후 지금까지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대만해협 위기’를 조성했다. 1차 대만해협 위기 때, 중국은 연안에 있던 다천군도에서 국부군을 몰아내고, 진먼섬과 마쭈군도에도 포격을 계속했다. 1958년에도 진먼섬을 포격해 2차 위기를 조성했다. 미국은 중국에 핵무기를 사용하겠다고 위협하거나 7함대까지 파견해, 전면전이 벌어질 위기까지 몰고갔다.
중국은 1979년 미-중 수교 때까지 주기적으로 진먼섬을 포격했고, 이는 일종의 군사적 의례가 됐다. 미-중이 밀월 관계를 구가하던 1995년에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리덩후이 총통이 당선되자, 중국은 해협에 미사일 시험 발사를 하며 3차 위기를 일으켰다.
이는 대만에 대한 자신들의 주권을 확인하는 한편, 전면전도 불사한다는 중국의 군사적 의례였다. 대만을 향한 중국의 군사적 의례는 최근 방공망 침입으로 진화했다. 중국은 올해 들어서만 전투기로 모두 200여차례에 가까운 대만 방공망을 침입했다. 과거 진먼섬 포격이 육상전력을 상징했다면, 대만 방공망 침입은 해상을 장악하는 해공군력을 과시하는 것이다.
대만은 미-중 수교 때 핵심적인 쟁점이었다. 미-중 수교가 늦어진 것은 대만의 지위에 대한 중국의 주장 때문이었다. 1972년 리처드 닉슨의 전격적인 중국 방문 때 마오쩌둥은 “대만 문제는 100년 뒤에 논의하자”며 피해 갔다. 이에 미국도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하나의 중국’ 원칙에 동의하면서도, 대만의 현 지위를 유지하는 현상 유지 방침에 합의할 수 있었다.
대만은 현재 세계의 공장이 된 중국의 공급망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아이폰을 생산하는 폭스콘이나 세계 최대 반도체 회사인 티에스엠시(TSMC)는 대만 기업이지만, 중국 시장이 그 무대이다. 중국 내의 웬만한 유통 기업들도 대만 기업이다. 대만의 현상 유지는 중국이나 대만, 미국 등 국제사회에 필수적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16일 첫 화상회담에서 격렬한 표현을 쓰며 입장을 천명했으나, 사실은 대만의 현상 유지를 강조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며, 대만해협에서 현상을 변경하는 일방적 행동을 강력히 반대한다고 말했다. 시진핑 주석은 “인내심을 갖고 평화통일을 이루려 하나, 대만 독립·분열세력이 도발하고 금지선을 돌파하면 우리는 부득불 단호한 조처를 할 것이다”라고 맞받았다.
미-중은 서로 대만의 현상 변경을 하지 마라고 경고한 것이다. 바이든은 “우리가 상식적인 가드레일을 세우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고 했다. 백악관은 가드레일은 경쟁을 책임 있게 관리하기 위해 세워진다고 설명했다. 이는 ‘하나의 중국’ 원칙 아래 대만의 사실상 독립적 지위는 유지한다는 것이 미-중 사이의 ‘가드레일’임을 의미한다.
대만의 현상 유지가 모두에게 윈윈 게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대만을 둘러싼 분쟁은 불가하다. 하지만 역사에는 이런 이성을 따르지 않은 경우가 많다. 미-중의 대결은 불가피하다 해도, 두 나라가 가드레일을 세워서 지키고, 서로의 금지선을 넘지 않아야 한다. 모두가 대만의 현상 유지를 말하면서도, 대만을 놓고 대립하는 것은 그만큼 대만이 갖는 지정학적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한겨레>에서 국제 분야의 글을 쓰고 있다. 신문에 글을 쓰는 도중에 <이슬람 전사의 탄생> <지정학의 포로들> 등의 책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