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집행정지 기간이 지난 뒤 구치소로 복귀하지 않은 수감자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휴대전화와 은신처를 제공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는 수감자를 범인도피교사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절도 혐의로 2018년 1월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고 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ㄱ씨는 악성고혈압을 이유로 형집행정지를 신청했다. 형집행정지는 수형자의 질병 등의 이유로 형 집행을 계속하기 어려울 때 일시적으로 석방하는 제도다. 검찰은 한 달 동안 형집행정지를 허가해, ㄱ씨는 같은 해 10월10일 석방됐다. 3주 뒤 ㄱ씨는 형집행정지 연장 신청을 했으나, 검찰은 불허했다.
이에 ㄱ씨는 도피하기로 마음먹고 연인이던 ㄴ씨에게 연락했다. ㄱ씨는 ㄴ씨에게 ‘수사기관 추적을 받을 수 있으니 아들 명의로 휴대전화를 개통해달라’고 부탁했다. 또 ㄴ씨 어머니 집에 자신을 숨겨달라고 했다. ㄴ씨는 자기 아들 이름으로 휴대전화를 개통해 ㄱ씨에게 건네주고, 그해 11월8일부터 12월17일까지 자신의 어머니 집에 ㄱ씨가 머무를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러다 결국 ㄱ씨는 범인도피교사 혐의로, ㄴ씨는 범인도피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은 지난해 1월 ㄱ씨의 혐의를 인정해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 ㄴ씨에게는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ㄱ씨는 ㄴ씨를 교사해 추적을 받던 자신에게 휴대전화와 거주지를 제공하게 해 범인인 자신을 도피하게 했다”고 판단했다. ㄱ씨는 항소했고, ㄴ씨는 항소하지 않아 형이 확정됐다.
반면, 2심은 ㄱ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범인 스스로 도피하는 행위는 처벌 대상이 아니다”라고 판단한 것이다. 2심 재판부는 “ㄱ씨 행위는 형사사법에 중대한 장애를 초래한다고 보기 어려운 통상적인 도피의 한 유형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자신의 방어권을 남용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ㄴ씨에게 범인도피죄를 범하게 했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대법원도 “원심판결에 범인도피교사죄 성립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없다”며 원심을 확정했다고 21일 밝혔다.
한편, 법조계 일각에서는 형집행정지 도중 도피에 대한 처벌 규정이 미흡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창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중병으로 형집행정지 허가가 나왔다는데 도주했다면 심사를 더욱 엄격하게 할 필요가 있다”며 “현재는 형집행정지나 보석 상태일 때 도주해도 도주죄로 처벌할 수 없다. 별도의 처벌 규정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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